헛똑똑이

2024.11.10 20:36 입력 2024.11.10 20:42 수정

‘똑똑한 장남’에겐 클리셰가 있지 않은가. 부모와 손아래 형제들의 뒷바라지로 상경해 혼자 잘난 줄 알고 떵떵거리며 일을 벌이다 결국 집안 기둥을 뿌리째 뽑는다는 괘씸한 이야기. 아니, 이야기보다는 풍속이라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나는 그런 유의 이야기를 들으면 장남도 아니면서 괜히 마음이 따끔따끔해졌다. 왠지 그 이야기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자라며 부모와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한 적도, 양보한 적도 없었다. 늘 내가 먼저였기에 가족의 배려는 당연하였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를 위해 가족들은 많은 것을 숨겼다. 사회초년생 시절 더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도 나는 미래의 나를 위해 급여가 턱없이 적은 인턴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나 불황으로 인해 가장 먼저 불행해지는 것은 일자리가 불안정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재계약을 약속받았던 인턴들은 가장 먼저 해고되었다. 최저 시급도 받지 않고 일을 했던 건 모두 그 약속 때문이었지만 우리는 내쫓기면서도 회사의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자리.’ 그건 믿을 구석 없이 절박해진 사람들이 기꺼이 현혹되고 싶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자리는 대체로 비슷했다. 직무를 맡기 위해 훈련하는 시간이 짧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도리어 빚이 생겼다. 당연히 제대로 된 고용계약서도 없었다. 내가 내 돈 1000만원을 투자한 회사 역시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된 건 이미 그들에게 돈을 맡기고 난 후였다. 나는 내 돈을 온전히 되찾고 싶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얼마간 속아 넘어간 척 그들의 장단을 맞추다 보면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직원’이 아니라 엄연히 ‘투자자’였으니까.

‘똑똑하다’는 착각

매니저는 나를 내 또래의 여자들이 가득한 테이블에 앉히면서 ‘지금 함께 앉은 사람들이 앞으로 활동을 같이할 팀’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어중간한 퀄리티의 도시락을 먹으면서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팀원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나와 같은 사회초년생이었다. 그들이 힘없이 목례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적당히 있다가 투자금만 돌려받으면 되지만, 이 사람들은 회사에 붙잡혀 물건을 강매당하고 대출을 권유받으며 또 다른 희생자를 발생시킬 것 아닌가? 모두에게 이 회사의 진실을 어떻게 알리지? 똑똑한 나만이 불쌍한 이들을 구제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어수선한 틈을 타 선량한 그들을 구하려 했다. 그런데 팀원 중 한 명이 갑자기 일어나 우리가 먹고 남긴 음식물 쓰레기와 플라스틱 도시락 용기를 모두 일반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하려던 말을 모두 잊고 다급히 외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분리수거를 하셔야죠!”

똑똑한 나는 기어코 사기꾼들이 만든 조악한 세트장 한가운데 서서 기후와 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음식물이 묻은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안 된다고, 우리가 버린 일회용품이 바다를 오염시킨다고. 팀원들은 ‘여기서 왜 그딴 얘기를 하냐?’는 표정이었지만 입이 터진 나는 그 참에 묵혀둔 마음의 말을 이어서 쏟았다. 강연도 교육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전부 사기 같으니까 다들 이쯤에서 돌아가자. 저는 직원이 아니라 투자자니까 제 말을 믿어도 된다. 팀원들은 모두 혼이 나간 채 나의 폭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호흡이 조금 가라앉자, 팀원 중 하나가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저희도 다 투자자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투자자라고요.”

타자들은 가끔 자기한테 오는 공이 어떤 구종인지 알면서도 삼진을 당한다. 청년들이 당하는 사기는 마치 그 공과 같다. 부모에게 보이스피싱 예방법과 가짜뉴스 판별법을 알려줄 정도로 똑똑하지만, 세상의 악의는 보통 그런 자만심을 겨눠 더욱 기상천외한 변화구를 준비한다.

난간에서 외치다

이러한 악의가 가득한 사회에서 내가 똑똑하다는 착각은 ‘돈’과 ‘혐오’를 통해 공고해진다. 나는 똑똑하니까 돈을 불릴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나는 똑똑하니까 멍청한 놈들과는 다를 거라는 착각. 나 역시 그 착각에 빠져 사기를 당하고도 한동안 그 사실을 부정했다. 대신 고작 1000만원이라는 돈에 사활을 걸게 만든 부모와 가족을 원망했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멍청한 놈들이라 비난했다.

그렇게 나는 ‘똑똑하다’는 착각에 빠져 내가 설 수 있는 자리를 점점 좁혀 나갔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모두 나를 떠난 뒤였다. 결국 내가 딛고 선 자리가 한 뼘짜리 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착각이 결국 내 마음의 난간에서 나조차 떨어트리게 될 거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참회하듯 난간을 붙잡고 살기 위해 외쳤다. 나는 똑똑하지 않다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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