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오클랜드 그레이린(Grey Lynn) 지역 커뮤니티 센터 공원과 주차장, 강당은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장터로 탈바꿈한다. 인근 농부들이 직접 농산·축산물 및 가공품을 가져와 파는 파머스마켓(농부시장)이 열린다.
노엘 버크가프니(64)는 지역에서 생산된 채소와 육류를 사려고 매주 이곳을 들른다. 그의 단골인 농부 어기 매카스(34)는 유기농법으로 작물을 기른다. “이 울퉁불퉁한 마늘을 보세요. 완벽한 모양이 아니지만 신선하고, 환경에도 좋죠. 대형 슈퍼마켓엔 없어요.” 마늘을 골라 담던 버크가프니가 말했다. 그는 매카스와 그가 재배한 농산물을 신뢰했다. 근처에서 갓 수확한 채소를 직접 보고 고를 수 있으며, 그 작물을 키운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있어 매주 파머스마켓을 찾는다고 했다. 값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말이다.
한국에선 버크가프니처럼 믿고 찾는 ‘아는 농부’를 만나기가 힘들다. 농장 대형화와 로켓 배송 시대에 소비 농산물 뒤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커녕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땅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길러내는 일의 수고로움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도 어렵다. ‘유기농이 비싸다’고 생각하면서도, 화학 제초제나 비료를 쓰지 않으려고 농부들이 1년 내내 들인 부단한 노력에도 생각이 잘 닿지 못한다.
전 세계 유기농 농지 절반 이상(2022년 기준 5300만㏊)이 자리한 오세아니아 대륙에서는 호주를 중심으로 친환경 농업을 시도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농사 과정에 대한 무관심 속에 친환경(유기농+무농약) 농가 수가 수년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2020년 기준 5만9249가구에서 2023년 4만9520가구로 줄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경향신문은 (사)한국친환경농업협회가 청년 친환경 농업인과 관계자 등 20명을 대상으로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진행한 ‘2024년 친환경 농업 청년 리더 육성 국외연수’에 동행해 답을 구했다. 대규모·수출 중심이 아닌 지속 가능한 농업을 꿈꾸는 소규모 농가들을 8박10일간 찾아갔다. 농가들은 지역 공동체 일원으로 서로 이어진다. 유기농산물을 넘어 지속 가능한 농업을 지지하는 소비자·지역 사회의 존재가 친환경 농법을 추구하는 소농들을 지탱한다.
유기농업 메카 호주·뉴질랜드
전 세계 친환경 농지 과반 차지
공공텃밭에서 농업·생태 교육
공원 등에선 ‘농부시장’ 운영
지역민, 인근 농장 ‘구독’하기도
유기농산물 비싸도 가치 인정
자원봉사자들 몰려 농사 체험
지역 농장 ‘꾸러미’ 구독하는 마을 사람들
호주 멜버른에서 서북부로 1시간 반쯤 가자 드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에간스타운에 위치한 약 27만9233㎡(8만4000평) 규모의 ‘유기 양돈 목장’인 조나이 농장에 뿔 짧은 소와 검은 돼지 여럿이 보였다. 돼지들은 자유롭게 초지를 뛰어다녔다. 한 배에서 난 새끼들끼리 지내도록 느슨한 전깃줄로 구역을 나누었을 뿐이다.
농장주인 태미 조나스(54)와 스튜어트 조나스(53) 부부는 버릴 것 없는 순환농업을 추구한다. 인근 양조장과 마트에서 얻어온 곡물 찌꺼기와 초콜릿을 혼합 발효해 먹이로 준다. 도축업자이기도 한 아내 태미가 정형하고 남은 부산물을 부부가 직접 만든 기계에서 분해해 퇴비로 만든다. 태미는 “분업화된 공장 농업에선 생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면서 “우린 이 농장에서 가축을 키우고 팔기까지 전 과정을 우리 손으로 해내면서 그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을 낭비 없이 다시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부부는 이 방식으로 기른 돼지를 그냥 팔지 않는다. ‘구독료(subscription fee)’를 낸 이들을 상대로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정해진 수량을 ‘돼지 꾸러미(pig share)’ 형식으로 제공한다. 이 같은 지역 내 꾸러미 구독 형식의 유통을 ‘공동체 지원 농업(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이라 부른다. 선택한 고기 무게에 따라 구독료를 정한다. 연간 90만~300만원 사이인데, 조나스 부부가 돼지를 기르는 방식을 존중하는 고객들은 이 선급금을 기꺼이 지급한다. 태미는 “80가구, 약 250명이 우리 CSA 회원인데, 11년째 구독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CSA는 농부와 소비자 간 신뢰로 굴러간다. 믿고 구독한 소비자들은 농사가 잘되었을 때는 잘된 대로, 아닐 땐 아닌 대로 꾸러미를 받는다. 스튜어트는 “사정이 생겨 두 달치를 몰아서 제공한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농사의 성패를 소비자가 함께하는 격이다.
렉스 찰머스와 조시 윌리엄스는 조나이 농장에서 돼지에 밥 주는 일을 한다. 그 대가로 텃밭을 무상으로 빌려 일군다. 두 사람은 ‘타파네리그로워스’라는 사업체에서 채소 CSA를 운영한다. 샐러드 채소, 순무, 토마토 등 여러 작물을 기른다. 이들은 “토마토가 풍년이면 더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닌 대로 준다”며 “이해해주는 소비자들이 있어 오히려 농사 능률이 오른다”고 했다. 수량에 얽매이지 않으니 여러 실험을 해볼 수 있고, 더 다양한 작물을 꾸러미에 보내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CSA는 새로운 유통법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2009년부터 여성 농민들로 구성된 ‘언니네텃밭’ 등이 여러 지역에서 CSA 꾸러미 사업을 이어왔다. 한국은 농촌 고령화로 꾸러미 공동체가 줄어드는 추세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농장을 홍보하는 일이 익숙한 청년 소농들 사이에서 CSA가 괜찮은 유통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주로 전국으로 배송되는 한국의 꾸러미와 달리 이들은 차로 닿을 수 있는 주변 지역을 기반으로 CSA를 운영한다. 조나이 농장과 타파네리그로워스가 인근 지역에 마련한 거점에 꾸러미를 각각 모아 두면 근거리 고객들이 알아서 가져간다.
농장에 방문하기 쉬운 거리 덕에 농민과 소비자는 직접 대면한다. 이는 신뢰로 이어진다. 찰머스는 “우리 농장은 유기농 공식 인증을 받지 않았지만, 우리 고객들은 우리가 유기농법으로 짓는다는 걸 알고 있다”며 “언제든지 농장에 우리를 보러 올 수 있기에,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라고 했다.
도심 ‘유기농장’으로 연결되는 땅과 사람
지역 기반의 CSA가 가능한 건 지역사회의 유기농산물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땅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길러내는 일에 관한 이해와 환경을 덜 해치는 유기농법이 전 지구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농장이 몰린 지역뿐 아니라, 도심 곳곳에서도 도시 농장과 친환경 파머스마켓 안내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호주 세레스(CERES) 환경공원은 ‘유기농 농사’를 멜버른 시내에서 지을 수 있는 공공텃밭이자 교육 장소다. 지역 주민들이 공업단지였다가 버려진 땅을 텃밭으로 바꾸었다. 1982년부터 공원 운영을 시작했다.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한다. 세레스는 멜버른 유일의 유기농 육묘장과 유기농산물 유통사업 등 수익사업도 한다.
‘무료’ 영업이 가능한 것은 4만2795㎡(1만3000평) 부지를 시의회가 연간 ‘1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사실상 무상으로 빌려주기 때문이다. 그 기반으로 가꿔진 유기농장과 생태정원은 연간 10만명의 학생이 농업·환경 공부를 위해 찾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세레스 매니저 메린 레이든(42)은 “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가치를 담은 작물을 먹고 있는지를 알리고 다시 사람들이 지구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세레스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은 자원봉사자들이다. 유기농사, 새싹채소, 가드닝 팀에서 상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 기꺼이 지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출판편집자인 앤지 스트래큰(47)도 그중 하나였다. 스트래큰은 매주 월요일 가드닝팀에서 정원을 관리한다고 했다. 지난 11월4일 세레스의 한 언덕에 앉아 잡초를 뽑던 그는 “야외에 나와서 손에 흙도 묻히고, 몸을 움직이는 게 삶에 활기를 준다”며 웃었다. 최근 몇년 사이 멜버른에서는 도시농업에 관심을 두는 청년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농사일을 배울 겸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도 세레스를 찾는다.
모든 게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레이든은 “도시농업의 수익 구조는 취약하다. 많은 이들이 농사일 이외에 부업을 병행한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생활물가가 오르면서 일반 농산물보다 가격이 높은 유기농산물 소비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도 했다.
직간접적으로 농사를 체험하고 배우는 공간은 그 자체로 농업에 관한 이해를 높인다. 연수에 동행한 한국 농업인들은 세레스에서 생산된 농산물 매대에 얼룩덜룩하거나 모양이 균일하지 않은 과일과 채소가 진열된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B품을 죄다 진열해 놨다” “예쁜 것 말고도 안 좋은 것, (벌레가) 파먹은 것을 상관하지 않고 담는다”는 말이 나왔다.
세레스를 찾은 고객들은 “원래 유기농산물은 완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전에 세레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 모니크 퍼튼(43)은 “작물을 길러보니, 내 마음처럼 되는 게 없더라”며 “환경친화적인 농산물을 지지하는 게 그 모양을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화학약품 없이 자라 ‘못난이’가 될 수밖에 없는 유기농산물에 대한 인식은 좋아지는 편이지만 매끈하고 예쁜 농수산물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한다. 한 농업 관계자는 “한국에선 친환경농가 중 B품 판로가 없어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 여기선 B품이 그 자체로 판매될 수 있구나 싶어 부러웠다”고 말했다. 세레스에서 한국 농업인들은 ‘사고파는 물품’을 넘어 ‘지구를 살리는 삶의 방식’으로서 유기농을 체화한 시민들을 미리 만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