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민주주의 지켜낸 시민들의 용감한 저항

2024.12.04 18:15 입력 2024.12.04 20:56 수정

지난 3일 밤 10시25분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국회가 있는 여의도로 몰려갔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여의도까지 한 걸음에 달려온 고등학생, 도서관에서 기말시험 공부를 하다가 참여한 대학생도 있었다. 모두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였다. 젊은 여성은 국회 담을 넘어 경내에 진입하려는 군인에게 “하지마!”라고 소리치며 울었다. 중년 남성은 군인들이 내리는 버스 입구를 몸으로 막았다. 누군가 “계엄 철폐”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따라 했고, 큰 외침이 되었다.

국회 주변은 시민과 계엄군, 경찰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이날 밤 11시48분부터 4일 오전 1시18분까지 24차례에 걸쳐 헬기가 굉음을 내며 밤하늘을 가로질러 국회로 진입했다. 헬기엔 무장한 계엄군 230여명이 타고 있었다. 계엄군 50여명은 추가로 국회 담장을 넘었다. 유혈사태 우려와 공포가 엄습했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애국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윤석열의 기습적인 ‘친위 쿠데타’를 막은 국회 앞은 시민 저항의 상징적 자리가 됐다.

그 시각 광주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에도 시민들이 모였다. 그들에게 윤석열은 전두환이었다. 한 시민은 “비상계엄이라니,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라고 절규했다. 시민들은 군 복무 중인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면 안 된다고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에도 윤석열과 비상계엄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 글이 빗발쳤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운 윤 대통령은 스스로 사퇴하라”고 밝혔다.

시민들의 뜻과 마음이 제복 입은 군인과 경찰에도 전해져 다행히 유혈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대치 와중에 4일 오전 1시 국회가 비상계엄령에 대한 해제 결의안을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시민을 반역하고 군까지 동원한 군 통수권자의 헌정 중단 시도는 그렇게 157분 만에 진압됐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계엄령이 “1960~1970년대에 통치한 군부 독재자 박정희의 전술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작가 한강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후 스웨덴 공영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끔찍한 일들이) 반복되는 것 같다”면서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역사를 허투루 배운 윤석열은 독단적으로 끔찍한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1960년 4월, 1980년 5월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계엄군은 그때처럼 총칼로 무장했지만, 시민들은 저항했고, 결국 윤석열의 계엄 시도를 막아냈다.

오만하고 무도한 대통령에 결딴날 뻔한 한국 민주주의가 또 한번 중대 고비를 넘었다. 계엄은 해제됐지만,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공권력을 남용하고 국민을 배신한 윤석열 부부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고,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는 매우 어려운 과제가 시민 앞에 놓였다. 권력자는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권자인 시민을 이길 수 없다.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내란 범죄’인 만큼 즉각적인 수사와 탄핵 절차로 관련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이는 주권자인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이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자정을 넘긴 4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된 뒤 국회 앞으로 시민들이 몰려들어 계엄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자정을 넘긴 4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된 뒤 국회 앞으로 시민들이 몰려들어 계엄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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