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송의 아니 근데
2024.12.19 06:00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흥’을 입은 저항, 거리의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시키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둑맞은 12일’을 보냈다. 12월3일, 45년 만의 계엄령 선포와 해제 이후 국민들은 거리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20년 동안 광장정치는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으며 느리고도 끈질기게 변화해왔다. 이번 탄핵 촉구 시위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역시 응원봉 문화이다. 촛불로 상징되던 시민의 의지는 이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빛, 평소에는 좋아하는 대상을 응원하는 데 쓰이던 빛,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인 빛이다.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이 주목받고, 집회 현장에서는 K팝이 울려 퍼졌다.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가 흐르고, 다양한 정체성을 내세우는 깃발이 흔들리는 가운데 세대를 초월한 이들이 함께 노래했다. 이 뭉클한 경험을 통해 K팝이 새로운 민중가요로 자리매김했다는 진단에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민중가요’는 투쟁가요, 혹은 항쟁가요로도 불리며 주로 사회운동에서 불리는 노래를 총칭한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주류 노래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기반으로, 대중들이 구전이나 카세트테이프 등의 독자적인 유통 구조를 통해 향유했다. 1970~1980년대 대중가요가 반발을 산 것은 정부 차원에서 노래를 검열했기 때문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팽배한 절망과 고통을 노래하는 민중가요는 학생운동의 성장과 함께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민중가요의 갈래를 이루고 노래 집단 ‘노래를찾는사람들’이 큰 인기를 끌며 대중적인 성공을 일구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학생운동이 쇠락하고, 노동운동이 탄압을 받으며 민중가요는 축소되었다. 이 시기부터 대중가요의 주류는 오늘날 K팝으로 불리는 장르로 바뀌지만 저항 정신은 가요에서 형식적으로나마 계승되었다. 예를 들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 H.O.T.의 ‘전사들의 후예’, 젝스키스의 ‘학원별곡’ 등이 한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와 학교폭력 등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고, 10대들의 저항 정신을 노래했다.

집회 현장에 울려퍼진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민중가요의 대명사 ‘임을 위한 행진곡’과 교차하며 세대 융합 이끌어
비장함 대신 흥 무기로 투쟁 현장 파고든 노래…2030 여성부터 소수자까지 모두 저항 주체로 재탄생

음악은 문화적 산물이기에 장르 불문 그 자체로 정치성을 내포한다.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러하다. 예술은 해석의 가능성에 열려 있으며, 수용자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이번 집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기존의 민중가요와 교차하며, 새로운 민중가요로 자리매김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스스로를 민중가수로 정체화하는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2021)가 스타일리시한 신곡 민중가요라면, 2007년 발매된 소녀시대의 ‘다만세’는 이 노래가 통과한 여러 맥락 속에서 민중가요로 소환된 곡이다. ‘다만세’는 SM의 신인 걸그룹 소녀시대의 데뷔곡이었다. 소녀시대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남성으로부터의 성적 대상화와, 여성으로부터의 배척을 동시에 경험했다. 활동 연차가 쌓이자 언론은 이들이 더는 ‘소녀’가 아님을, ‘나이 먹어서 경쟁력을 상실한’ 여자임을 조롱했다. 한편, K팝이 운동의 현장에 등장하면서 정치적 층위가 생기기 시작한다. 퀴어 문화 축제가 적극적으로 K팝을 수용했다. 이는 매년 대치하는 혐오 세력이 표방하는 ‘비장함’을 무너뜨리는 ‘흥’의 전략이었다. K팝이 흐르는 퀴어 문화 축제는 신나는 현장, 재미있는 곳이 되었으며 노래 하나로 뒤섞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했다. 2016년, 이화여대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스크럼을 짠 채 ‘다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주목받았다. ‘무서워서, 다 아는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다만세’의 노래 가사가 저항과 탐색의 의미로 재발견되고, K팝이 새로운 세대가 연대하는 매개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순간이다. 소녀시대의 노래를 부른 소녀들. “가장 취약하지만 최대의 잠재성을 가진 존재 혹은 망가진 현재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미래 사이의 시간에 존재하는 소녀”(조혜영, ‘페미니스트 소녀학을 향해’, <소녀들>, 여이연)는 세간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이화여대 시위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면서, ‘다만세’는 민중가요로 호명되었다(여성은 언제나 정치적 주체였음에도 항상 ‘소녀’이자 ‘젊은 여성’으로만 호명되며, 매번 처음 출현한 존재처럼 경이로움 속에 관찰된다는 사실은 비판할 지점이다).

2022년, 제빵기사 임종린은 SPC의 노조 탄압과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며 50여일간의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슬픔의 케이팝 파티’ 주최 측인 복길은 일상이 된 K팝과, ‘일상을 빼앗긴 자’ 사이의 연결고리를 고민하며 양재동으로 향했다. “여자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달콤한 것을 내밀지만, 결국 그들을 끝없이 생산자로 착취하고 소비자로 포섭하는 K팝 산업의 속성이 그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복길, <복길의 채무일기>, ‘슬픔의 K팝 집회’, 경향신문, 2024·12·8)이다. 복길은 K팝 팬들의 삶 안에도 각자가 겪는 투쟁의 역사가 있음을 명시한다. K팝이 민중가요로 소환될 때, ‘철없는 취미생활이나 즐기는 어린 여자’였던 팬덤은 자신의 투쟁을 연결고리 삼아 세상과 연결되는 정치적 주체이다. K팝이 오늘날 민중가요로 전유되는 또 다른 이유는, 노동 탄압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K팝의 위상을 떠받들면서도 K팝이 노동 현장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돈을 많이 버니까’ 그가 겪는 직장 내 괴롭힘 따위는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아이돌을 포함한 특수고용노동자(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등 포함) 200만명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K팝은 화려함 속에 감춰진 노동 현실을 일깨운다.

민중가요는 수용자의 자발성이 결정하는 장르다. 대중가요였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었듯이. 어떤 K팝은 민중가요로 호명되고, 어떤 K팝은 그렇지 않다. 소녀시대의 역사가 어린 여성의 일상적인 투쟁과 포개지면서, 여성들이 여성혐오를 내세워 당선된 대통령을 파면시키기 위해 모여 부르는 ‘다만세’는 저항의 의미를 획득한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가사에 여성비하적인 표현이 있는 노래를 집회 현장에서 배제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 과정 또한 명백한 정치이다. 민중가요가 된 K팝을 통해 왜곡되고 단절되었던 정치성을 회복할 수 있다. 보통 정치는 선거와 특정 정당, 국회의원의 얼굴로 인식된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면 안 된다거나, 투쟁을 할 때 ‘순수한’ 투쟁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띠진 않았는지 의심하는 행위는 탈정치화가 ‘중립’이자 지향점이라는 인상을 부추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정치는 다양한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역학과 맥락, 그 산물이다.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확보하는 것’이다. 불화는 불평등한 관계를 뒤흔드는 공통의 무대이며, 이 갈등 속에서 정치적 주체는 존재한다. 반면 몫 없는 자들의 결핍이나 보충을 무시하고, 기존 사회의 분배를 수호하는 논리는 ‘치안’이다. 치안을 유지하려는 측은 정치적 행위, 즉 불화를 폭동이나 과도한 이익 추구, 민폐로 매도한다. 동덕여대 시위를 폭력 시위라고 비난하거나,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를 ‘선량한 시민에게 민폐를 끼치는 세력’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정치적 주체는 고립되고, 정치적 행위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으로 학습된다. 2010년 이후 일간베스트의 공작은 정치적 활동을 운동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꿘충’과 같은 혐오 발언으로 운동권을 라벨링하며 정치혐오를 주입했다. 이 공작은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2024년, 광장에 참여한 이들은 경험했다. K팝이 울려 퍼지는 이 현장은 비일상적인 곳이 아니다. 삶과 직결되는 정치를 논하는 곳에서 ‘꿘충’이라고 타자화했던 이들이 위기의 순간 가장 앞에 나서서 자신들의 몸으로 길을 튼다. 장애인, 퀴어, 성소수자, 철거민, 빈자, 성노동자 등이 뒤섞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함께 노래한다. 더는 죽은 자를 앞세우고 싶지 않고, 한 명도 더 잃고 싶지 않은, 산 자로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번에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이 광장에 걸렸다.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혐오하지 말라는 제안이 포함되었다. 여성 대통령을 향한 여성혐오가 만연했던 2016년 광장에서 조금 더 나아간 변화이다. 이 역동 속에서 협소했던 ‘우리’, 치안을 선호하고 불화를 배척했던 경계는 더 무너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다만세’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특별한 기적 대신 일상적 연대와 참여로 ‘함께’하는 것, 동일성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를 존중하며 곁에 머무르는 것. ‘다시 만난 세계’는 완전한 형태로 갑자기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지금의 상상과 희구 속에서 조금씩 움튼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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