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기아(KIA) 타이거즈의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우승으로 2024년 프로야구도 마무리됐습니다. 올해 KBO리그는 한국 프로 스포츠 최초로 1000만 관중을 동원하며 어느 때보다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2030 여성 팬들이 늘어나며 리그도, 각 구단도 흥행에 성공했죠.

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30대 여성 기자가 야구 붐을 바라보는 짧은 연재 “‘얼빠’ 아니고 ‘야빠’인데요”를 시작합니다. 안타가 뭔지도 모르던 ‘야알못’이 어떻게 ‘야빠’가 되었는지, 야구장 ‘큰 손’이 된 여성 관객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지 함께 이야기 나눠 봤으면 합니다.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①] “야구 룰은 다 아냐”고요?…룰 모르는데 경기를 어떻게 보나요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②] ‘40년 고인 물’ 아저씨 팬이 말했다 “크보는 여성 팬에게 투자하라!”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③] 서울에서 ‘흥참동’ 지방 구단을 응원한다는 것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④]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야구 보는 거야?” “네? 뭐라고요?”

국민대 여자야구팀 선수 박정현(왼쪽부터)·김은빈·김가현·진희우씨가 지난달 2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김정화 기자

국민대 여자야구팀 선수 박정현(왼쪽부터)·김은빈·김가현·진희우씨가 지난달 2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김정화 기자

“기자님은 살면서 이렇게 가슴 설레는 일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저희는 지금 다들, 진짜 너무 설레고 두근거리거든요.”


진희우씨의 얘기에 순간 할 말을 잃었습니다. ‘가슴 설레는 일’이라…. 매일 집과 회사만 반복하는 직장인에게는 너무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여기, 매일 가슴이 설렌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양손 곳곳 물집이 잡히고, 생전 처음 겪는 근육통에 온몸이 비명을 질러도 전혀 힘들지 않다고, 그저 하루하루 기대될 뿐이라고요.

‘국민대 여자 야구팀’ 선수들의 얘기입니다. 국내에서 대학 최초로 만들어지는 팀입니다.

<‘얼빠’아니고 ‘야빠’인데요> 연재를 시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이야기는 여성 선수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1992년까지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여자 선수와의 계약을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해요. 이 규정이 폐지되고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야구는 남자의 종목, 소프트볼은 여자의 종목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있죠.

그래도 미국이나 일본에선 종종 여성 선수들도 주목받는 데 비해 한국은 그야말로 여성 야구 불모지에 가깝습니다. 2007년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이 생겼지만, 아직 여자 야구 실업팀도 없는 상황이에요. 여성은 야구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을 받기 어렵습니다.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일본 여자 실업리그 무대에 진출한 김라경, 지난해 봉황대기 전국 고교야구대회와 올해 황금사자기 전국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손가은, JTBC 예능 <최강야구>에 출연해 선발 테스트에 나온 박주아 등 몇몇 선수들만 가뭄에 콩 나듯 주목받곤 했죠.

제2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장기 컴투스 프로야구 여자야구대회. 한국여자야구연맹  홈페이지

제2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장기 컴투스 프로야구 여자야구대회. 한국여자야구연맹 홈페이지

‘왜 더 많은 여성들이 야구장에서 뛸 수 없을까? 할 사람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제도가 없어서 그런 걸까? 누군가 지원만 해준다면 여자 선수들도 야구장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야구가 너무너무 좋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을 재입학하기도

여자 선수들의 얘기를 꼭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6월, 국민대와 장안대는 처음으로 여자 야구팀을 창단하겠다고 밝히고 입학생 모집에 나섰습니다. 지금 국민대 야구부는 한창 실기 시험 등 입시 전형이 치러지는 단계인데요. 이미 합격을 확정 짓고 입학을 앞둔 학생들 일부가 일찌감치 모여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떨리는 마음을 가득 안고 이 선수들을 지난달 23일 직접 만나고 왔어요. 뜻밖에도 훈련 장소는 경기 시흥시에 있는 실내 풋살장이었습니다. 웬 풋살장이냐고요? 야구팀 단장 격으로 운영을 총괄하는 양석원 국민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입학한 게 아니라서 제가 따로 공간을 빌려 선수들을 훈련하고 있는데요. 실외 야구장은 날씨가 추워 부상 위험이 있고, 지금은 기초 훈련부터 필요한 단계라서요.”

지난달 23일 찾은 경기 시흥시 한 풋살장 네트에 야구 배트와 글러브가 기대져있다. 김정화 기자

지난달 23일 찾은 경기 시흥시 한 풋살장 네트에 야구 배트와 글러브가 기대져있다. 김정화 기자

지금까지 모인 선수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에 다니다가 자퇴 후 편입하려는 학생도 있어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오로지 야구라는 꿈을 좇아 온 ‘만학도’ 진희우씨도 그중 한 명입니다.

올해 서른 살인 희우씨는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야구가 너무너무 좋았다”고 했어요. 멀쩡히 하던 일을 관두고 대학에 다시 입학해 선수의 길을 걷겠다는 ‘무모한 결정’을, 이 문장 하나로 설명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그에게 야구란 말 그대로 ‘인생’이었습니다.

“저희 때는 여자가 야구 하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잖아요.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어떻게든 외면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정말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나 봐요. 제가 여자 야구 국가대표 안수지 선수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입학 원서 접수를 앞두고서도 계속 고민했는데, 안 선수를 생각하니까 마음속에서 용기가 났어요. 그래서 ‘저 하겠습니다’ 했죠.”

2024 LX배 한국여자야구대회. 한국여자야구연맹 홈페이지

2024 LX배 한국여자야구대회. 한국여자야구연맹 홈페이지

현재 선수들은 주말 이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훈련합니다. 배트를 쥐고 타격하는 법, 공을 던지고 받는 법, 스텝을 밟는 법까지 하나하나 처음부터 배우고 있어요. 선수 출신이자 서울 한서고, 경기 김포 분진중, 경북 구미대 등에서 야구부를 맡았던 김익 감독이 이들을 직접 지도합니다.

이날 훈련은 김 감독이 날리는 타구를 선수들이 잡아내며 수비 능력을 키우는 ‘펑고(fungo)’ 연습, 두 명이 짝지어 공을 던지고 받는 연습, 티볼대에 공을 놓고 하는 타격 연습으로 이뤄졌습니다.

“손목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글러브가 앞으로 나오는 거야. 힘을 빼라고.”

“왼발을 뺐다가 앞으로 나가면서 오른발을 내고, 그렇지.”

감독이 먼저 시범을 보이고, 선수들이 따라 하고, 그다음 자세를 고치고, 다시 연습하는 과정이 몇 시간 내내 무한 반복됐습니다.

“여자애가 곱게 자랐으면 곱게 공부나 하지”
주위에선 여전히 편견, 걱정 가득


국민대 여자야구팀 선수 박정현(왼쪽부터)·김은빈·김가현·진희우씨가 지난달 2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김정화 기자

국민대 여자야구팀 선수 박정현(왼쪽부터)·김은빈·김가현·진희우씨가 지난달 2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김정화 기자

선수들은 공식 훈련 시간이 끝난 뒤에도 자발적으로 저녁까지 나머지 연습을 하고 갈 정도로 열정적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야구를 배우게 된 스무 살 김가현씨에게 이 시간은 소중할 따름입니다. 가현씨는 “야구를 보는 게 너무 좋아서, 직접 해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여기 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운동 자체를 처음 배우니까 힘든 것도 많아요. 그런데 새로운 걸 도전하고, 나도 다른 선수들도 조금씩 실력이 느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감독님이 선수들 단체 채팅방에 스윙이나 캐치 동작 영상을 보내주시거든요. 주말에만 같이 연습할 수 있으니까, 평일에는 그걸 보고 혼자 공부도 하고 있어요.”

이들이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뚫어야 했던 가장 큰 관문은 역시 가족 등 주위 사람들의 우려였습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선수를 하겠다는 것부터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인데, 가뜩이나 ‘마이너’인 여자 야구 선수라니요. 누가 봐도 어려운 이 길을 흔쾌히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티볼을 했던 경험으로 야구팀도 같이 오게 된 동갑내기 친구 김은빈·박정현씨도 그랬습니다. 정현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사회인 야구를 잠깐 했는데, 부모님 반대가 컸어요. 그래서 평범하게 공부해서 대학교에 갔죠. 부동산학과였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이번에 여자 야구팀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된 후 ‘이거다’ 했어요.”

생전 처음 배트와 글러브를 잡는 선수들의 손은 멀쩡할 날이 없다. 김은빈씨의 손 곳곳에 물집이 잡혀 있는 모습. 김정화 기자

생전 처음 배트와 글러브를 잡는 선수들의 손은 멀쩡할 날이 없다. 김은빈씨의 손 곳곳에 물집이 잡혀 있는 모습. 김정화 기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전히 손녀가 야구 하는 걸 반대하십니다. “여자애가 곱게 자랐으면 곱게 공부나 하지, 왜 스스로 험한 길로 가려고 하느냐”고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응원이 정현씨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버지가 헬스 트레이너거든요. 제가 워낙 야구를 좋아하고, 또 재능이 있다는 걸 아니까 저를 믿어줘요. 네가 좋아하는 것, 뭐든지 네가 행복한 것을 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힘이 났어요.”

은빈씨는 어릴 때부터 계속 축구를 했는데요. 부상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야구로 눈을 돌렸습니다. 야구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가지고 있던 축구 장비를 죄다 팔고, 그 돈으로 글러브와 야구화, 운동 가방 등을 새로 샀대요. 단체 유니폼을 맞추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숫자로 등 번호를 정할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울컥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요.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야구 선수’가 당연한 일이 되기를”

국민대 여자야구부 김익 감독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정화 기자

국민대 여자야구부 김익 감독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정화 기자

수많은 학생과 선수들을 가르친 김익 감독에게도 여자 야구팀은 설레고도 긴장되는 도전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듯 처음 시작하는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게 뭐냐고 물었는데요. 그는 “‘멘털리티(정신)’ 부분”이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보통 운동할 때 기술적인 훈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아니에요. 멘털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운동한 사람이 아닐수록 더 그렇죠. 이제 막 시작했으니 당연히 체력이 부족해 빨리 지치는데, 그만큼 정신이 버텨줘야 포기 않고 끝까지 할 수 있어요.”

그는 “꾸준히 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선수 한명 한명 소통을 많이 하고,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키워주려고 합니다. 하루 이틀 만에 프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매일, 매주, 매달 꾸준히 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즐기면서요.”

국민대는 야구팀을 학점은행제 방식으로 운영할 예정인데요. 학생들이 졸업 후 심판이나 코치, 기록 분석원 등 다양한 진로를 택할 수 있도록 이론 부분의 전문적인 교육도 커리큘럼에 포함했습니다. 내년 3월 입학 후 이들은 평일에는 훈련하고, 주말에는 강의를 듣게 됩니다.

국민대 여자야구부 선수들이 김익 감독의 지시에 따라 훈련하고 있다. 김정화 기자

국민대 여자야구부 선수들이 김익 감독의 지시에 따라 훈련하고 있다. 김정화 기자

지금 당장 팀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실력을 늘리는 겁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만큼 프로 리그에서 보는 선수들의 모습을 따라잡으려면 피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정현씨는 “진짜 잘해서, 내년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어요.

그런데 이 목표는 단순히 우승하는 것, 야구를 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더 큰 꿈이 있습니다. 희우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야구가 하고 싶었으면 주말에 사회인 팀에서 뛰거나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보다는 여자 야구가 더 많이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지금 훈련을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고 있지만, 즐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여자 야구 역사의 ‘거대한 시작’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이들은 국민대를 시작으로 다른 학교에서도 더 많은 여자 야구팀이 생기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 대학 리그도 생기고, 실업팀과 프로 리그까지 언젠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우리보다 더 어린 소녀들,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야구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저희에겐 그런 희망과 사명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있어요. 여자 야구는 진짜, 앞으로 잘 될 일밖에 없을걸요?”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얼빠’라서 그렇다”, “룰도 모르면서 인증샷 찍으려고 온다”, 야구 보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 텐데요.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또는 직접 뛰고 운동하면서 겪은 불합리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아래 링크에 남겨주세요. 우리 함께 이야기 나눠봐요.

구글 폼 링크 ( https://t.ly/lm3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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