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면 2000년대가 시작되고도 ‘사반세기’가 흐른 시간대를 맞이한다. 한 세기의 4분의 1이라는 뜻의 사반세기라는 단어는 중후함이라든가 장대함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인간의 삶에서 25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많은 변화와 발전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서 사반세기라는 단어는 긴 시간 동안 큰 변화가 일어났다거나, 반대로 어떤 현상이 꾸준히 지속됐음을 서술하는 문장에서 자주 사용된다.
새로운 1000년을 맞이하던 25년 전 사람들에겐 ‘평화와 번영’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세계적으론 미·소 냉전이 종식된 뒤였고, 한국은 IMF 외환위기의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오랜 군부 권위주의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자부심이 팽배했다.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때 가졌던 희망과 기대를 떠올리면 모두가 허망한 느낌이 들 것이다. 냉전 종식으로 평화가 찾아올 거란 기대는 21세기 벽두에 미국에서 터진 9·11 테러로 처음부터 깨져 나갔다.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난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전쟁과 학살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글로벌 리더십이 시급하다는 요청은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외쳐질 뿐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우울한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무도함은 대한민국의 시계를 45년 전으로 되돌렸다.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 줄 알았던 계엄령을 현재에 되살렸다. 그 시절을 경험한 이들은 몸과 마음에 각인된 계엄령의 공포를 일거에 떠올렸고,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교과서나 책에서 봤던 계엄령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이내 거리로 뛰쳐나가 저항하고 규탄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2000년대의 첫해에 태어난 아기들을 1000을 뜻하는 옛말에서 착안해 즈믄둥이라고 불렀다. 즈믄둥이와 즈믄둥이의 형제자매들은 이제 청년이 됐다. 지금 이 순간 2030 청년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들이 겪는 부조리와 모순은 대부분 그들 책임이 아니다. 기성세대, 특히 무도한 통치자와 통치집단이 벌인 일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 참석자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지만 2030세대, 특히 젊은 여성 집단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 서구에서 ‘회복력’(resilience)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됐다. ‘다시 튀어 오른다’는 라틴어 단어에서 출발한 이 말은 원래 물리학이나 공학에서 자주 사용됐다. 공학에서 회복력은 어떤 외부의 충격이나 교란으로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물체나 시스템이 기존의 모양이나 상태로 돌아가는 복원력이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이 단어는 21세기 들어 어떤 공동체가 직면한 생태적·환경적 위기 혹은 재난적 상황에 대처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 확장됐다. 2020년 1월6일 미국 연방의사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습격을 받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도 민주주의의 회복력이 강조되었다.
12·3 비상계엄은 국회의 즉각적인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가결로 해제됐지만 충격과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시민들의 요구와 힘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됐고 탄핵심판 절차와 수사가 동시에 시작됐지만 대통령과 행정부, 여당의 버티기는 사태의 조속한 정리와 정상 상태로의 복귀를 가로막고 있다.
매일 밤 언 손을 녹여가며 경복궁역으로, 광화문으로, 헌법재판소 앞으로 모이는 시민들은 정상 상태로의 조속한 회복을 염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회복은 단순히 계엄 이전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회복력이 높은 시스템은 외부 충격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정상적인 기능을 되찾지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매일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이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 윤석열 탄핵과 체포를 외치는 사이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싹트고 있다. 그래서 2000년대의 첫번째 사반세기를 보내는 심정은 참담하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이 싹튼다’는 상투적인 표현에 기대를 걸고 새로운 사반세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