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화투점을 치며 무엇을 기다렸을까

2025.01.02 21:22 입력 2025.01.02 21:26 수정

[정지아의 할매 열전]이모는 화투점을 치며 무엇을 기다렸을까

나는 그이를 광주 이모라 불렀다.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엄마가 친구라 했으니 비슷한 또래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광주는 머나멀었다. 아버지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는 광주 이모 집에서 자고 먹었다. 이모 집은 넓은 정원이 딸린 멋진 한옥이었다. 전통 한옥은 아니었던지 마루 끝에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이모는 고급스러운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가 서양인처럼 새하얗고 볼이 통통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가장 하얀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한복처럼 고급스러운 것도 같고, 어딘지 나른한 것도 같았다. 이모가 미닫이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며 자울자울 졸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그 나른한 첫인상 때문이지 싶다.

이모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딸의 얼굴은 두어 번 봤다. 내 엄마라고 해도 될 만큼 나이가 많았고, 직장에 다니는 노처녀였다. 나보다 열두 살이 많다는 아들은 한 번도 못 봤다. 대학생인지 뭔지 오빠는 노상 집에 있었는데 밥 먹을 때도 제 방에 틀어박혀 늘 기타만 쳤다. 그닥 잘 치는 솜씨는 아니었다. 오빠 얘기만 나오면 이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가타부타 어떤 말도 하지는 않았다. 폐보다 훨씬 더 깊은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습하고 어두운 한숨만 계속해서 내쉴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자다가 눈을 떴다. 눈이 오네이. 제복싸니 눈이 쌓였는디 버스가 댕길랑가, 뭐 그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다시 까무룩 잠으로 빨려들던 나를 엄마의 한마디가 훅 현실로 끌어당겼다.

“씨도둑질은 못허는 법이네. ○○를 쏙 빼닮았그마. 멀라고 역부러 욕을 묵고 사능가?”

“알아보겄능가… 뽈갱이 새끼로 사는 것보담사 낫겄제.”

“아무리 근다고 첩 새끼로 맹글어서야 쓰겄능가. 쟈도 지 친아부지는 알아야제.”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기타만 튕기는 오빠의 탄생에 무슨 사연이 있는가 보다 짐작했을 뿐이다. 그래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기타나 튕기는가, 어쩐지 오빠의 처지가 안타까워 싸그락싸그락 눈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몇 방울 눈물을 떨구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모의 남편은 엄마의 동료로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죽기 얼마 전 어느 깊은 밤 살짝이 자기 집에 다녀갔다. 그 얼마 뒤 목숨을 잃었다. 위험을 불사하면서라도 죽기 전에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만큼 부부의 의가 좋았단다.

그날 밤의 결과로 오빠가 태어났다. 행여 남편이 다녀간 걸 들킬까 임신한 배를 꽁꽁 싸매고 다니던 무렵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알려준 경찰이 이모에게 흑심을 품었다. 결국 이모는 그이의 첩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남편이 죽기도 전에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년이라며 모진 욕을 퍼부었다. 경찰은 왜 그랬는지 죽은 남편의 아이를 제 아이라 세상에 속였다. 그리고 집 한 칸을 마련해 이모와 자식 둘을 광주로 끌어올렸다. 우리가 광주에 다니던 시절 이모와 그 경찰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른다.

이른 아침 내가 눈을 뜰 때마다 이모는 노상 나른한 얼굴로 화투점을 치고 있었다. 집 전체의 분위기는 촤악 가라앉아 침만 꼴딱 삼켜도 지진이 일 듯했고, 이모가 착착 내려치는 화투 소리, 옆방에서 들려오는 어설픈 기타 소리에 나는 숨이 막힐 듯했다. 부엌에서는 출근을 앞둔 언니가 조심스럽게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오직 그 소리만이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화투점을 치며 무엇을 기다렸을까?

빨갱이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빨갱이도 그 자식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이라 경찰의 혼외자로 살아야 했던 그 오빠는 끝내 제대로 살지 못했다. 근 삼십년 전 이모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소식조차 알지 못한다. 격동의 시대가 삶을 뿌리째 뒤흔들어 부평초처럼 삶이라는 물결 위를 외롭게 떠다녀야 했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더는 그런 슬픈 삶이 탄생하지 않기를, 다시 또 격동하는 시대에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많이 본 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