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미소

2025.01.05 21:01 입력 2025.01.05 21:04 수정

바람이 칼처럼 날아다녔다. 회색 구름은 움직이는 성처럼 산성봉에서 노고단으로 내달리고 트럭 열 대는 주차하고 남을 노인회관 앞뜰엔 팽나무 낙엽만 몰려다녔다. 회관 입구 난간에 보행보조기와 지팡이가 늘어서 있었다. 그 끝에 그보다 썩 커 보이지 않는 대평댁이 허리를 뒤로 젖힌 채 화엄사 쪽을 바라보고 있다. 고정화면 같았다. 나는 점심약속이 있어서 읍내로 가려다가 차에서 내렸다. “엄니! 추운데 뭐 할라고 나와 서 계신대요. 옷도 얇게 입고.” 대평댁의 답은 짧았다. “간전성이 안 와요”

잠시 설명을 끼우자면, ‘간전성’은 ‘간전댁 형님’의 줄임말이다. 택호(宅號)인 ‘○○댁’으로 부르지만 나이가 많은 분에게는 어머니들 간에 ‘형님’의 방언인 ‘성님’이나 ‘성’을 덧붙인다. 택호 어미인 ‘댁’의 발음이 야박하게 들리는지 ‘덕’으로 바꿔 불러서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는 떡이 넘친다. 일천떡, 용강떡, 오봉떡식이다.

마을회관에선 주민들이 보통 점심을 같이 드신다. 식사 준비 담당인 대평댁이 큰형님인 간전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간전댁은 1934년생이니 아흔을 넘겼다. 일주일에 세 번 면사무소로 출근해 오전 청소 업무를 담당한다. 한 달 30만원이 채 안 되는 수당이지만 간전댁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다. “오시겠죠. 바람이 너무 불어요. 들어가 계세요 엄니. 제가 지켜볼게요.” 대평댁은 대꾸도 않고 버스정류장 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 고개만 넣고 안을 들여다보니 밥상도 펴놓고 수저와 반찬도 깔아놓은 상태다. 10여명의 어머니들이 일시정지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간전댁이 전화도 안 받는다며 걱정만 난무했다. 다시 나와 옆에 선 내게 대평댁이 흘리듯 얘기했다. “요며칠 몸이 안 좋아 보였는데, 이렇게 추운 날은 출근하지 말지. 버스 안 내리고 읍내 병원으로 갔으까.” 찬 바람 탓인지 힐끗 본 대평댁 눈곱자리가 젖어 있었다. 지나가는 버스에 움찔했던 대평댁은 다시 굳었다. 겨울바람 30분은 버거운 상대였다. “면사무소에 알아볼게요. 퇴근하신 건지.”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날몰댁이 나왔다. “이장님! 간전떡 통화됐어요. 집에 있대요. 지금 내려온다마.”

대평댁은 서둘러 회관으로 들어갔고 나는 간전댁 집을 향해 언덕으로 뛰었다. 중간쯤 휘어진 돌담 옆으로 간전댁이 돌아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간전댁 특유의 무표정에 카리스마가 가득하다. 눈으로 ‘어떻게 된 거예요’ 여쭤봤지만 간전댁은 ‘뭔 일 있대요?’ 눈빛이었다. 아침에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서 출근을 못하셨다고 했다. “대평떡 엄니가 이 바람에도 한참 나와 기다렸어요. 버스정류장만 바라보면서요. 들어가 계시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내가 한두 발짝 앞서 걸으면서 왜 전화도 안 받으셨냐는 투로 간전댁에게 얘기했지만 아무 답도 없었다. 야속한 마음에 멈춰 서서 뒤돌아보니 먼 곳을 바라보는 간전댁은 입꼬리만 씨익 올렸다.

회관에 간전댁과 같이 들어서니 어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밥을 푸고 국을 떠서 막 상에 놓는 참이다. 대평댁이 간전댁이 앉는 자리에 수저를 놓고 코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워쩌케 아셨댜. 그렇잖아도 가스가 떨어져서 밥이 늦어졌는디, 간전떡이 딱 맞춰 왔구마요.” 간전댁은 웃을 뿐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이장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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