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이란 말이 요즘처럼 뉴스에 자주 나온 적도 없던 것 같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기관의 권리나 권력이 미치는 범위다. 사실 조직 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중요한 결정이나 지시가 필요할 때 ‘이건 내 권한 밖’이라며 결정을 미루는 사람이 어느 집단에나 있다. 반대로 누군가가 민감한 사안을 마음대로 처리하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라는 반응이 뒤따른다. 권한은 ‘책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권한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한을 애써 축소하며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면 무책임한 인간이 된다. 반대로 자신의 권한을 과대 해석한 나머지 남의 권한을 침해하면 월권이 된다. 무책임과 월권 사이에서 적정선을 유지하며 권한을 행사하는 게 어디서나 중요하다.
1987년 헌법 체제 수립 후 한국 사회의 기본으로 받아들여진 민주적 원리와 헌법적 가치들이 12·3 비상계엄 사태로 부정당한 후, 권한이란 말도 자의적으로 동원돼 남용되고 있다. 상식 수준에서 수용되고 지켜져야 할 원칙들이 온갖 법 기술과 억지 논리에 비틀어지며, 건건이 헌법적 해석을 받아야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는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권한과 권한이 충돌하면서, 권한을 따져보자는 다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헌정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자가 “대통령의 권한” 운운하며 자신의 범죄 행위를 무슨 특별한 권한이라도 행사한 것처럼 오도한다. 수사기관의 수사에 권한이 있느냐 시비 걸고, 법원에서 발부한 영장마저도 판사 권한을 벗어났다고 우긴다. 명분 없는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남발해 논점을 흐림으로써 사법시스템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 임명동의를 받은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 중 2명을 임명한 것을 두고도 “권한대행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는 몰염치한 반응이 대통령실에서 나온다. 국회가 선출한 3인에 대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헌법에 규정돼 있고, 직무정지된 대통령의 권한과 의무를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신 수행하는 사람이 최 권한대행인데, “권한대행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는 불만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문제 제기인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최 권한대행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본부장을 비롯해 대통령,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등 1인 4역을 맡고 있다. 지난 3일 하루 공식 일정만 해도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 중대본 회의, 김수한 전 국회의장 영결식 참석, 중소기업 신년인사회 참석, 주한 미국대사 접견, 경제계 신년인사회 참석 등 6개에 달한다. 본업인 경제 분야부터 참사 수습, 외교 분야까지 전방위로 움직이고 있다. 이번주부터는 부처별로 올해 업무계획 보고도 받을 예정이다. 이것도 권한대행의 권한을 넘어선 것인가.
40년을 관료로 살아온 최 권한대행이 요즘처럼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깊게 고민해본 적이 또 있을까 싶다.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하든 정부 기능이 멈추지 않고 작동하도록 관리·유지하는 일에 최적화된 집단이 관료다. 그렇게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이, 사상 초유의 사태가 연일 벌어지는 상황에서 고도의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한 국무회의에서 반발과 고성이 나오자 최 권한대행이 회의를 마친 후 눈물을 보였다는 보도가 과장된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기업들을 동원해 미르재단 설립에 관여한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경력에 오점을 남긴 기억도 새삼 떠오를 것이다.
탄핵 찬성 측과 반대 측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는 최 권한대행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얼마나 행사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준점은 명확하다고 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말처럼 정치 리스크가 장기화하면 국가신용등급에 악영향을 주고, 신용등급은 한번 내려가면 되돌리기 쉽지 않다. 검찰총장 출신인 현직 대통령이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수사진과 장시간 대치하는 상황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시장의 반응은 냉정하다. 지난 3일 개장 직후부터 상승폭을 키우던 코스피는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이 대통령경호처의 저지로 불발되면서 상승폭을 크게 줄였다. 지금 한국 경제의 최대 리스크는 헌법을 파괴하는 대통령이다. 이를 하루라도 빨리 해소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때로는 당연한 일을 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