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대통령과 식물

2025.01.06 21:28 입력 2025.01.06 21:32 수정

언제부턴가 ‘식물 국회’ ‘식물 정부’ ‘식물 대통령’이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되었다. 인터넷 국어사전은 식물 국회를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국회’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식물 대통령은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대통령’이란 뜻이다. 안타깝게도 식물을 바라보는 우리 관점이 이 용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국에는 이런 용어가 없는데, 급기야 외신에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식물 국회든 식물 대통령이든 그 속에 숨은 뜻은 의당 부정적이니, 식물에 빚진 나로서는 못마땅한 용어다.

푸성귀 따위로 식물을 인식하면 곤란하다. 지구상의 만물을 살리는 중추 역할을 하는 것이 식물이다. 세계적 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처럼 8개의 헌법 조항까지 만들며 ‘식물의 권리장전’을 주장하지는 못할망정, 우리는 식물을 정치판에 끌어들여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게다가 식물이란 단어를 앞에 붙여 전부 ‘제 기능을 못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제 기능을 못하는 식물은 어디에도 없으니 이 표현 또한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다른 생물에 빌붙어 사는 인간과 달리 식물은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평생 한곳에 뿌리박고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생물이 바로 식물이다. 이리저리 정당을 옮겨 다니며, 개인 영달을 꿈꾸는 정치인보다 훨씬 지조 있는 존재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식물 사회보다 못한 사회가 된 것일까?

지금에 비하면 옛사람들은 식물을 품격 있게 대했다. 조선 후기에 <화암수록>을 쓴 유박은 식물을 예스러운 벗, 맑은 벗, 우아한 벗 등으로 칭하고 친구로 삼았다. 그는 식물을 사람처럼 품계를 나누기도 했다. 퇴계 이황은 또 어떤가.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매화에 물을 주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변변치 못한 사람보다 매화를 더 사랑했다. 또한 조선 후기 정치가 목만중은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나 꽃을 평가하는 것이 같은 일’이라 하여, 꽃의 품격(花品)과 사람의 품격(人品)을 같은 격으로 보았다.

한편, 중국 송나라 사상가 소옹(邵雍)은 식물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뿌리와 줄기를 보고 꽃의 귀하고 천함을 알아보는 자가 으뜸이고, 가지와 잎을 보고 아는 자는 그다음이며, 꽃송이를 보고서야 아는 자는 아랫길(下秩)이다.”

아뿔싸! 식물 대통령을 뽑은 우리는 꽃송이만 보고 뿌리와 줄기를 알아보지 못한 아랫길이었단 말인가? 식물들이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들이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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