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의 원인을 밝혀줄 블랙박스에 충돌 전 마지막 4분의 기록이 저장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항공 전문가들은 사고기가 양쪽 엔진이 모두 고장나 ‘종이 비행기’처럼 기존 추진력만으로 비상착륙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12일 분석했다. 사고 원인 조사가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원인을 조사 중인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는 11일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항공기가 로컬라이저에 충돌하기 직전 4분간의 음성기록장치(CVR)과 비행기록장치(FDR) 자료 모두가 저장이 중단된 것을 파악했다”며 “앞으로의 사고조사 과정에서 자료가 저장되지 않은 원인을 파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주항공 여객기가 무안공항 19활주로 끝단의 로컬라이저 둔덕과 충돌한 시각은 지난해 12월 29일 오전 9시3분으로, 이에 앞선 오전 8시59분부터의 모든 기록이 중단됐다는 뜻이다. 당시 기체 상황을 비롯해 조종사들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한 필수 내용이 모두 날아가 버린 셈이다.
국토부가 현재까지 밝힌 사고 시간순서를 보면 여객기는 이날 오전 8시54분 활주로 01방향으로 착륙허가를 요청했고, 이어 8시57분 관제탑이 조종사에게 조류활동(버드 스트라이크)을 경고했다. 이후 2분 뒤 8시 59분 조종사는 관제탑에 “메이데이”를 세번 외쳤다. 이 시점부터 블랙박스에는 어떤 기록도 남지 않았다. 엔진 셧다운(공급 중단)이 벌어진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조종사는 오전 9시 복행(여객기가 착륙하지 않고 고도를 높여 비행하는 것)을 시도했지만 공항 주변 폐쇄회로(CC)TV에 담긴 영상을 보면 여객기는 고도를 거의 높이지 못한 채 활주로로 재접근을 시도한 뒤 오전 9시2분 활주로에 동체착륙했다. 랜딩기어도 내려오지 않았고 활주로 끝 방위각시설(로컬라이저) 둔덕에 충돌했다.
항공 운항 전문가들은 블랙박스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을 종합했을 때 사고기가 조류와 충돌한 후 양쪽 엔진이 모두 고장나면서 기체가 전원이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예측했다. 사실상 추진동력을 모두 잃은 여객기는 종이비행기처럼 기존 추진력만으로 비상착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봤다.
김규왕 한서대 비행교육원장은 “엔진 성능이 급격히 저하되는(엔진 서지·Engine Surge) 현상 또는 심각한 기체 손상이 있었다는 말”이라며 “처음 버드스트라이크 당시만 해도 한쪽 엔진은 미세하게나마 살아있었던 것 같은데 ‘고 어라운드(재착륙을 시도하는 것)’를 하는 과정에서 나머지도 망가지며 셧다운 됐다면 두 개의 엔진이 모두 멈추는 상황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거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드문 경우”라고 덧붙였다.
블랙박스의 기록이 전혀 남지 않았다는 점 자체도 이례적이라 향후 원인을 따져봐야하는 대목으로 꼽힌다. 보잉777 등 다른 기종은 비상용 배터리 역할을 하는 보조장치가 있어 전원공급이 끊긴 이후에도 블랙박스 기록이 되지만 사고 여객기는 비상용 배터리 역할을 하는 보조장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블랙박스 FDR·CVR분석을 위해 지난 6일 미국 워싱턴으로 갔던 사조위 조사관 2명은 13일 오후 블랙박스와 분석자료 등을 들고 귀국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