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로 상징되던 ‘제3세계’로부터 정치, 경제적으로 탈출하는 데 기적적으로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세계적인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전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한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신생 민주주의의 안착과 공고화의 조건으로 자유민주주의 기본원리에 대한 엘리트들의 공감과 실천을 들었다. 반면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 연고주의, 적대적 진영정치, 선거불복, 주술정치 등은 공고화를 방해하는 후진형 정치의 특징들이다.
2006년 군부 쿠데타 이후 태국은 총리직에서 쫓겨난 탁신 친나왓을 지지하는 레드셔츠 진영과 포퓰리스트 탁신을 반대하며 ‘탁신포비아’(탁신혐오)를 생산해내는 옐로셔츠 진영으로 두 동강 났다. 반면 탁신이 이끄는 타이락타이당에 총선 때마다 패배했던 보수 성향의 민주당은 급기야 좋은 쿠데타(good coup)를 주창하며 또 다른 쿠데타를 기획하려는 극우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들 극우세력은 민주당의 외곽부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선거불복, 정부종합청사 및 국제공항 점거 등 무정부 상황 조성을 의도했던 이들은 마침내 애초 목표했던 군부 쿠데타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2014년 5월22일에 일어난 19번째 쿠데타였다.
민주주의를 뒤엎은 후진형 정치는 태국의 이웃국가 미얀마에서도 발견된다. 4년 전인 2021년 2월1일 군부는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NLD가 압승하고 친군부 정당이 완패한 2020년 11월 선거를 부정선거라고 단정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등 3명을 체포하고 15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를 친군부 인사 중심으로 재편했다. 미얀마 군부는 이미 30년 전 친군부 정당이 패배한 1990년 5월 총선 결과도 불복한 바 있다. 연고주의로 똘똘 뭉친 미얀마 군부 엘리트 집단의 수뇌부는 공화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도 전근대적 점술에 의존했다.
2021년 2월1일 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민아웅흘라잉은 숫자 9에 집착했다. 세계 최대 불상이라 자랑한 마라위자야의 봉헌식을 2023년 8월1일에 거행한거나 불상 공사기간이 1143일인 것, 스님 900명을 초청한 것, 미얀마 포함 9개국 스님들을 초청한 것 등은 모두 각 숫자의 합이 9다. 1962년 쿠데타로 현재의 군정시대를 연 네윈 장군 역시 권력을 영구히 장악할 수 있는 왕과 같은 통치자가 되려면 숫자 9를 가까이해야 한다는 점술가의 조언에 따라 기존에 없던 45짯, 90짯 지폐를 만들었다. 민아웅흘라잉의 전임 군총사령관 탄슈웨 역시 2005년 점술가의 조언에 따라 양곤에서 북쪽으로 320㎞ 떨어진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고 도시 이름을 ‘왕의 도시’란 의미인 네피도로 정했다. 불교조직 마바타의 수장 위라투 승려는 이렇듯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미얀마 군 최고지도자들을 일관되게 지지해온 극우 종교인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대한민국에서도 파워엘리트들의 후진적 정치의식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 비민주적 시민사회를 발견하게 된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암울하기만 했던 태국과 미얀마에서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2023년 5월 총선에서 내전을 유발했던 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청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왕실 개혁과 군 개혁을 내건 신생 정당 까오끌라이가 제1당이 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내전 상황에 있는 미얀마에서도 최근 민아웅흘라잉의 쿠데타 세력이 정치, 군사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있다.
12·3 이후 다시 열린 광장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회복시켜가고 있는지, 비상계엄 쿠데타 기도 세력은 어떻게 몰락하는지, 극단적 진영정치를 넘어 성숙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만들어질 것인지, 후진형 정치와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이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