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월, 미국으로 떠났던 이수만이 수년간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갖고 돌아온 것은 학위가 아니라 새로운 음악산업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불과 1년 전인 1980년, 미국은 MTV의 등장과 함께 대중음악의 혁명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보기’ 시작했고, 마이클 잭슨, 프린스, 마돈나와 같은 퍼포머형 가수들이 새로운 팝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듀란듀란과 조지 마이클로 대표되는 영국 팝음악의 뉴웨이브가 뒤따랐고, 흑인들의 강렬한 비트와 춤사위로 상징되는 솔과 힙합이 포크와 컨트리를 밀어냈다. 그리고 보이밴드 열풍의 주역인 뉴키즈온더블록이 데뷔했다. 이수만은 이 새로운 흐름을 현지에서 관찰하고 그것이 한국 대중음악에 미칠 변화에 대해서도 정확히 포착했다.
88올림픽 전후로 한국에 불어닥친 댄스음악의 유행 속에서 ‘춤’과 ‘흑인음악’이 중심이 될 가요의 미래를 비교적 정확히 읽고 있었던 그는 이태원을 찾아가 현진영을 발굴했다. 타고난 춤꾼에 재즈뮤지션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 재능도 비범했던 현진영은 이수만과 프로듀서 홍종화의 트레이닝을 받아 한국 최초의 힙합 가수이자 ‘뉴잭스윙’의 기수가 되었다. 현진영과 와와의 데뷔와 함께 ‘백댄서’에 머물렀던 춤꾼들은 어느덧 그룹의 정규 멤버로 격상되었고, 이 발상의 전환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계승되어 대중음악 혁명의 핵심적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수만의 비전은 단지 세대나 장르의 교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발굴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기획되어 통제되고 관리되는 아티스트, 성인이 아닌 청소년층을 집중 공략할 그들만의 맞춤형 스타, 가수-댄서-래퍼가 한 몸을 이루는 퍼포머형 아티스트. 스타는 발견하는 게 아니라 키워낸다는 철학에 바탕을 둔 ‘아이돌’ 산업에 대한 비전은 1995년 설립한 SM엔터테인먼트의 첫 가수인 HOT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요는 K팝으로 재탄생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SM은 무얼 바꿔냈을까. 가장 중요한 성과는 한국 대중음악의 문화적·지리적 지경을 넓힌 것이다. 보아를 시작으로 소녀시대, 엑소 그리고 에스파에 이르기까지. K팝은 이제 온라인에서부터 미국 주류 팝의 한복판까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인종적·문화적 한계를 뛰어넘었고, 아시아 변방의 저열한 로컬음악이라는 고정관념을 상당 부분 깼다. 이제 K팝은 빌보드가 인정하는 공식 카테고리가 되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산업이 되었다. 정작 국내에서는 폄하되던 아이돌 음악을 통해 세계 음악산업의 지각 변동을 이끌어낸 것이고 그 가운데에는 ‘문화산업’이란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SM의 시스템과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관심은 향후 SM의 행보에 모아진다. 영미권 팝음악을 추종해 결국 동시대성을 획득한 지금, K팝의 다음 단계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결국 한국 음악으로서의 정체성 확보와 팝 보편주의의 확립에 있을 것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K팝은 더 이상 ‘진출’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 옛날 우리가 그랬듯 이제는 K팝의 ‘기술’을 베껴 맹렬히 도전해오는 후발주자들의 경쟁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제 K팝은 영미팝의 팔로어가 아닌 K팝발 팝음악 혁신의 새 국면을 주도하는 리더로 거듭나야만 하며, 틈새시장과 하위문화가 아닌 당당한 주류문화로서 한국만의 오리지널리티와 보편주의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K팝의 역사이자 K팝의 퍼스트 무버였던 SM이 고민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