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겨울은 푸르다. 수확이 끝나 황량한 ‘육지’ 논밭과 달리 제주 밭에선 겨우내 채소가 자란다. 월동(越冬), 겨울을 살아 넘긴다는 그 이름처럼 무·당근·양배추 등 월동채소들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적당한 추위를 견디며 영글어 간다.
푸른 밤, 바다, 야자수로 유명한 제주는 국내 겨울철 신선채소의 약 80%를 공급하는 생산 기지다. 다른 지역 농민들이 쉬어가는 11~2월은 제주의 농번기다. 겨울에도 채소를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건 제주 농사 덕이다. “겨울엔 우리가 전 국민을 먹여 살리는 거지.” 수확이 한창인 지난해 12월2~6일 경향신문이 만난 제주 농민들은 오랜 자부심을 내비쳤다.
근심도 컸다. 지난해에는 제주에 폭염과 가뭄, 긴 가을장마가 찾아왔다. 심지어 11월 말 ‘첫눈 폭설’이 전국 곳곳을 마비시킨 그때 제주엔 내리 비가 내렸다. 내려선 좋을 게 없는, 예상에 없던 비였다. 농민들은 “더 이상 날씨를 예측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변덕스럽고 고온다습한 날씨는 작물을 가리지 않고 피해를 준다. 채소와 과일은 썩거나, 웃자라고 터지거나 벌레에게 뜯어먹혔다.
20~30여년 농사를 지어온 농민 10여명은 “매해 몸으로 기후 변화를 느껴왔지만 이번처럼 유난스러운 것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눈치껏 파종 시기를 늦추는 등 어떻게든 날씨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한다. 이들 마음엔 ‘언젠가 임시방편이 통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는 불안이 자라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제주 각지를 찾아 서로 다른 작물을 기르는 농민들의 고민을 들었다. 이곳 ‘기후위기’는 관용어가 아니라 실제 위기,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벌레 먹거나 터지거나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밭에서 강순희씨(58)가 겉잎에 구멍이 송송 난 양배추 속을 뒤적이자 숨어 있던 벌레가 움찔하며 꿈틀댔다. 도둑나방 애벌레(유충)였다. 해충은 매년 기승을 부리는 종이 달라지더라도 날이 추워지는 12월엔 잠잠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따뜻한 날씨에 벌레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비료를 주러 왔다가도 벌레 잡느라 시간이 다 간다니까.” 강씨가 잡은 애벌레를 발로 밟아 죽이며 말했다. 30년차 농부이자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강씨와 남편 김만호씨(59)는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고 있었다. 친환경 방제약으로는 죽지 않아서다. 친환경 농사를 20년 넘게 지어온 부부도 12월이 넘어서까지 벌레를 잡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양배추 속이 알차게 차오르지 않아 이 시기 뿌리지 않던 추가 비료를 줘가며 노심초사하는 와중에 벌레와 사투까지 벌여야 하니 부부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관행농업(慣行農業·화학비료와 합성 농약을 사용해 작물을 재배하는 관행적인 농업)으로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밭 3만7000평(약 12.23㏊)에서 양배추 농사를 짓는 박용규씨(57)는 “올해 친환경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농작물 농약은 치료 약이 없고 예방약뿐”이라며 “농약을 평년보다 두세 번 더 뿌려야 했다”고 설명했다.
고산리 박씨 밭에선 조생종 양배추 수확이 이뤄지고 있었다. 보통 8월 중순 파종해 12월 거두어들인다. ‘고산평야’라 불릴 정도로 끝없이 뻗은 밭 곳곳에 양배추를 담은 포대가 보였다. 언뜻 잘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양배추들은 온전한 한 포기 상태 상품으로 팔지 못한다. 한여름 이상고온에 비까지 많이 오자 양배추가 성장을 멈출 시기에도 자라며 터져버린 탓이다.
박씨는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다 보니 상품성이 많이 떨어져 아예 즙이나 샐러드 등 가공용으로만 팔게 됐다”고 씁쓸히 말했다. 가공용 가격은 상품 양배추의 60~70% 수준이다. 8월 말~10월 초에 심어 무더위를 견디는 기간이 적었던 중생·만생종은 작황이 괜찮다는 게 그나마 박씨의 위안이다. 그는 “시세가 안 나 손해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농사를 망쳐본 건 처음”이라며 “이건 사람 힘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 더 속상하다”고 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사를 짓는다는 건 예측이 불가능한 날씨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시장·마트에서 흔히 보는 예쁜 꼴의 농작물을 길러내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박씨와 함께 방문한 고산농협 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선 콜라비를 크기별로 선별하고 있었다.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라간 콜라비 중 600~800g쯤이 ‘상’ 등급으로 분류돼 상자에 담겼다. 반면 880g이 넘는 콜라비는 ‘비품’이라고 쓰인 박스로 떨어졌다. 너무 커버려 울퉁불퉁해진 콜라비들이다. 비품 상자가 수북했다.
콜라비는 월동채소다. 차가운 겨울을 더 견디다 1월부터 수확에 들어가야 한다. 양배추처럼 콜라비도 웃자라는 바람에 농가들이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이렇게 커버린 기형과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다”며 “예전엔 전체의 10% 정도였다면 이번엔 체감상 30~40%가 비품”이라고 했다.
농약 치고 하우스 짓고
평생 농사를 지어 온 농민들은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30년 넘게 밭작물을 길러온 김형자씨(60)는 20여년을 해온 친환경 농사를 2년 전 관행농업으로 전환했다. 검질(잡초의 제주 방언) 매는 일을 해야 하는 등 품은 훨씬 들면서 수확량이 적은 친환경 농법을 더는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체력적으로도 나이가 있으니 힘들고 폐작될 확률도 높거든요.” 김씨가 말했다.
변화를 꾀했지만 1500평(약 0.50㏊) 밭의 40%가 길어진 가을장마에 침수돼버렸다. 주력 작물인 브로콜리 밭 하나는 흑색의 작은 점이 생기는 검은무늬병이 돌았다. 9~10월 기온이 높고 비가 자주 내린 탓이다. “겉으로 보면 밭이 파래서 잘 모르겠죠? 하나하나 보면 다 못 쓰게 됐어요.” 김씨가 작은 점이 박힌 브로콜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8월 말에서 9월 초에 심은 브로콜리는 거의 수확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브로콜리 전국 생산량의 70%는 제주에서 나는데, 다른 농가들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애월(제주시 애월읍)하고, 고산은 검은무늬병 피해가 더 심하대요.”
남편과 둘이서 쉬는 날 없이 일궈온 밭은 김씨에게 삶 그 자체다. 브로콜리는 고마운 작물이다. 마늘 농사를 했을 땐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생활했다는 그는 “학자금 대출을 껴서라도 아들 둘을 대학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브로콜리 농사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 귀한 작물이 병에, 수해에 망가지는 것을 보면 김씨는 “가슴이 능착하다(덜컹하다의 제주 방언)”고 했다. 뼈 주사를 맞을 정도로 허리가 좋지 않은 데다가 날씨 마저 종잡을 수 없게 된 요즘이지만 그래도 김씨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국 당근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제주 당근’도 상황은 비슷하다. 제주에서도 주산지인 제주시 구좌읍에서 친환경 당근 농사를 지어온 김병수씨(55)는 비닐하우스를 알아보는 중이다. 노지(露地·비닐하우스 같은 시설이 없는 맨땅) 농사를 고집한 지 25년 만에 먹은 결심이다. “하우스는 토양을 쉬지 않고 계속 쓰니 땅을 혹사하는 농법이라 여태까지 반대해왔다”는 그는 “노지는 이제 안정성이 너무 떨어져서 하우스 아니면 안 되겠더라”고 말한다.
7월 중순에 씨를 뿌린 당근은 뜨거운 햇볕에 싹이 소위 말해 ‘녹아버렸다’. 당근은 파종 후 물을 충분히 머금으면 5~10일쯤 뒤 발아한다. 예전에는 씨를 심으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선배 농부들은 “당근에 물 주지 마라. 내리는 비 맞고 싹이 나야 당근이 예뻐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씨 뿌리는 7~8월에 가뭄을 겪는다. 밤에 지열이 떨어지지 않아 뿌리가 상하고 기껏 틔운 싹도 타버렸다. “다들 스프링클러 설치하고 지하수 끌어다가 밭에 물을 뿌리는데, 이곳저곳에서 다 끌어다 쓰니 물이 안 나와요. 이걸 어떻게 해야하죠?”
김씨는 당근이 녹아버린 땅에 다시 씨앗을 뿌렸다. 당근 밭 1만평(약 3.31㏊) 중 재파종한 면적이 3500평(약 1.16ha)에 달했다. 이미 당근 파종 시기가 지난 8월 중순이었지만 씨앗을 뿌린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당근 수확철은 12월 중순이지만, 김씨는 아직 당근들이 채 크지 않아 오는 1월 말이 되어서야 거둘 것 같다고 했다. 지금 김씨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지만, 하늘 농사에만 의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기후변화 때문이다. 땅이 지나치게 뜨겁거나 비가 안 오다가 한꺼번에 오는 일이 최근 4~5년 사이에 빈번해졌다.
주변에서 친환경을 포기하는 농가도 늘었다. 씁쓸하지만 계속 농사를 지으려면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씨는 이웃 농가의 비닐하우스 한구석에서 루콜라를 키워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래도 제 하우스에는 난방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멀칭(mulching·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땅을 짚이나 비닐 따위로 덮는 일) 등에 필요한 농사 부자재도 재활용 가능 소재를 쓰려고 하고요.” 김씨가 말했다. 환경 부담을 줄이는 농사를 고민하고 있지만 그는 “기후위기 시대에 한 농가의 노력만으론 역부족임을 절실히 느낀다”고 했다.
아열대의 제주, 작물 바꾸면 그만?
지구온난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가 2022년 발표한 ‘시나리오별 아열대기후대 변동 예측 결과’ 자료를 보면, 기후변화로 제주·남해안 등 한국 국토의 11%는 이미 아열대 기후권에 속한다. 월평균 기온 10도 이상이 8개월 이상인 지역이 아열대 기후권에 해당한다. 연구소는 기후변화 시나리오상 온실가스 감축을 잘하지 못한 경우(SSP5-8.5)엔 2050년대에 전국의 55.9%가, 중간 정도로 감축을 진행(SSP2-4.5)하더라도 54.9%가 아열대 기후대에 속할 것으로 내다본다.
예견된 미래에 혹자는 ‘월동작물은 내륙에서 기르고, 제주는 아열대 식물을 기르면 되지 않나’라고 쉽게 얘기할지도 모른다. 당장 매년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겐 와닿지 않는 얘기다. 제주시 구좌읍에서 사회적농장을 운영하는 한태호씨는 여름이 서늘한 ‘강원도 고랭지’와 겨울이 따뜻한 ‘제주도 해안가’는 대체하기 힘들다고 단언했다. 한씨는 “그 두 산지가 바뀔 정도로 기후가 변하면 그땐 우리나라 농업 기반이 다 무너진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온난화는 단순히 더워지는 게 아니다. 폭염이나 한파 등 ‘극한 날씨’를 동반한다. 제주 월동채소의 핵심은 겨울에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날씨다. 한씨는 “전라도 해남이 따뜻하다지만 육지는 영하 6~8도까지도 금방 떨어진다”며 “그런 추위에서 월동 무는 다 죽어버린다”고 설명했다.
작물 변경도 쉬운 일이 아니다. 농산물은 상품이되 공산품이 아니다. 김병수씨는 “작물 하나를 파악하는 데 10년은 걸린다”고 했다. 온도, 토양상태, 파종시기 등의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생산이 잘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찾아 나가야 한다. 김씨는 “공산품처럼 원하는 스펙(품질)을 찍어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라고 했다. 생산자로서의 농민은 ‘적정 가격’을 받을 수 있는지도 따져야 한다.
작물 인기가 좋아서 생산량이 넘쳐버리면 가격 폭락을 면치 못하고, 이번처럼 작황이 좋지 않으면 가격이 오르더라도 외국산이 대량으로 들어올 위험이 크다. 지난해 초 ‘금(金)사과 파동’ 때 정부가 대체품으로 오렌지, 파인애플, 바나나, 망고 등 수입 과일을 직접 수입해 시장에 풀었던 것처럼 외부요인이 개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박용규씨는 “농사를 망쳐도 건진 만큼은 수확해 팔아야 하는데, ‘금(金)양배추’가 되면 외국산으로 가격을 눌러버리니 농민들은 오도 가도 못한다”고 했다. 내륙으로 운반하는 물류비가 추가로 드는 제주 농가들은 가격 경쟁에서 더 취약하다.
제주에서는 농부의 거주 지역에 따라 농작물의 종류가 결정된다. 화산지형인 제주는 토질이 지역별로 다른데, 그에 맞는 작물이 정해져 있다. 제주 남쪽인 효돈·위미·남원 등에선 노지감귤과 만감류를, 서쪽인 고산·대정·안덕에서는 양배추, 마늘, 양파 등을, 북부인 애월·조천 등에선 잎채소와 시설원예를, 동쪽인 김녕·구좌·성산에선 당근, 무, 감자 등 뿌리채소를 주로 한다.
월동 무 주산지인 서귀포시 성산읍에서 25년째 무 농사를 짓는 강동훈씨(64)는 “무만 하지 말고 당근도 병행해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해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만 강씨는 “무 농사 규모가 큰 성산에서 너도나도 당근을 하게 되면 (당근 생산량이 늘고 가격은 떨어지면서) 당근 주산지인 구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주도와 생산자 단체들은 제주 농산물의 과소·과대 생산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려 지난해 제주농산물수급관리센터를 개소했다. 고광덕 수급관리센터장은 기후위기 시대에 ‘적정 생산’을 농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 내다봤다. 그는 “1년을 망치면 고스란히 개인이 농사 빚을 떠안는 구조 속에서 농민들은 저마다 ‘이만큼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라는 절박함이 있다”며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숙제”라고 했다.
제주에서 귤나무가 사라진다면
머지않은 미래를 준비하는 곳도 있다.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는 품종 개발과 아열대 작물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망고·용과·파파야 등 아열대 작목 유전자 58종을 보유했다. 연구소 온실에서 과수를 기른다. 한현희 연구관은 “기존의 채소가 기후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상기상에 대처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그 둘 다 안 되면 아열대 작물을 기르는 수순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열대 작물 농사의 단점은 투자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산 과일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도 과제다. 판로를 뚫는 일도 쉽지 않다. 제주에서는 농가들이 바나나 등 다양한 열대 과일을 도입하려 했지만, 지금은 산남(제주에서 한라산 남쪽을 부르는 말) 지방의 망고 정도만 남았다.
망고는 열대 과일 중에서도 특히 난방이 많이 필요한 작물이다. 지난달 5일 김성일씨(54)의 서귀포시 안덕면 망고 하우스에 들어서자 후끈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25도로 맞춰진 온실에는 아직 이파리만 달린 낮은 나무들 사이로 암갈색·초록색의 알갱이처럼 보이는 꽃을 틔운 망고나무 하나가 보였다. 1월 초에야 꽃을 피워야 할 나무가 홀로 한달 앞서 꽃을 틔운 탓에 김씨는 수정을 도울 벌통 하나를 부랴부랴 구해와야 했다. 열대 환경을 맞춰주기 위해 앞으로도 난방은 계속 훈훈하게 둬야 한다. 여름에는 제습기를 돌리기도 한다. 그는 “몇천만원을 난방비로 따로 예금해두는 편”이라고 했다.
제반 비용이 많이 들지만 여태까지 김씨가 망고를 유지해온 것은 그만큼 가격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는 “잘 자라주기만 하면 꽃대 하나에 2만~3만원짜리”라고 설명했다. 한 그루에서 망고 50~60개가 열린다. 망고 농가가 늘어나면서 가격 보장이 어려워질 거란 생각에 그는 더 늦기 전에 작목을 바꿔봐야 하나 고민도 된다고 했다. 김씨는 “샤인머스캣 가격이 망가졌듯 망고도 그럴 수 있는 거다”라며 “기후위기로 농사의 불확실성도 높아지니 더 잘 판단해야겠더라”고 했다.
예전엔 제주에서 돈 되는 작물을 꼽으라면 단연 감귤이었다. 한때 ‘대학 나무’라고 불렸다. 대학까지 자식 교육이 거뜬할 정도로 수익성이 좋았다. 주산지인 한라산 남쪽 서귀포 일대 주민들의 소득이 북쪽 주민들의 소득보다 높았다.
다만 미국산 오렌지, 칠레산 포도, 국내산 딸기·사과 등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과일·과채류가 늘면서 명성은 빛이 바래졌다. 이상기후로 감귤 피해는 늘고, 온난화로 감귤 재배한계선은 전남·경남 일부까지 올라갔다. 이젠 제주의 많은 농가들이 노지 감귤 재배를 줄이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레드향·천혜향 같은 고급 만감류를 키운다.
김윤천씨(58)는 서귀포시 남원읍 비닐하우스에서 레드향·천혜향 농사를 짓는다. 노지에서 감귤 농사도 짓지만 크게 하진 않는다. 김씨네 비닐하우스는 몇년 전부터 폭염으로 열매가 갈라지는 열과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껍질이 얇은 레드향의 피해가 크다.
“저희는 그나마 나아요. 해안가보다 1~2도 낮은 중산간 부락에 있거든요. 아래쪽 해안가 부락은 전멸이에요. 순박한 농부들은 다들 ‘내가 뭘 잘못했나’라며 자신을 탓해요. 근데 제주 전체가 열과 피해를 입고 있거든요. 그건 재난이죠.”
앞서 제주에선 만감류인 한라봉이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하락하자 한라봉을 베어내고 레드향을 심은 농가가 많았다. 매년 계속되는 폭염 피해로 이번엔 레드향에서 천혜향으로 갈아타는 농가가 주변에 늘고 있단다. 김씨는 조만간 천혜향 가격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씨는 이상기후 피해를 개인 농가가 오롯이 감당하는 구조로는 제주 농사가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짚었다. 단순히 ‘농민’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닌 제주의 풍경이 바뀌는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씨가 되물었다. “제주의 봄 하면 유채꽃이 떠오르죠. 제주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이라면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던 때가 있었죠. 지금은 어떤가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채기름 등을 목적으로 한 제주의 유채 재배 면적은 1만~2만㏊에 달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유채 농가를 지원하던 국가 보조금이 폐지됐고, 유채기름은 외국산 카놀라유 등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2022년 재배면적은 95㏊로 줄었다.
김씨는 “제주 농업은 관광업과 연계되어 있다”며 “귤과 유채를 키우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게 단순히 농업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콩과 메밀을 키우는 두 친구
농부는 생산자이자 사업가이면서도 ‘땅에서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사람’이다. 제주에서 만난 농민들은 피해에 속상해하면서도 덤덤히 “어쩌겠어, 계속 농사는 지을 건데”라고 입을 모았다. 기후위기 시대의 농사를 지탱하는 건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농민들이었다.
같은 초등학교·중학교를 나오고 제주대학교 86학번 동기인 고성효씨(58)와 조영재씨(57)는 여전히 차로 4분 거리에 살며 농사를 짓는다. 안덕에서 식량 작물인 메밀과 콩나물 콩을 이모작으로 재배한다. 제주는 콩나물 콩 전국 생산량의 80% 이상을, 메밀 전국 생산량의 60% 이상을 책임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상기후로 콩농사와 메밀농사는 갈수록 팍팍해진다. 특히 지난해 가을은 고온다습한 기온 탓에 수확을 앞둔 콩에 곰팡이균이 번졌고, 꼬투리 안에서 콩이 싹을 틔우는 수발아 현상까지 생겼다.
기후위기 피해에도 둘은 농사를 접을 생각은 없다. 고씨는 “농사일을 하는데 지금은 의무감이 더 크다”며 “자긍심도 있고, 잘 살아내고 있구나 싶어서 후회도 없다”고 했다. 다만 그는 “지금은 농민들이 각자 지구온난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데 곧 한계에 이를 것”이라며 “기후가 덜 변화되게 하려면 시민과 정부가 같이 가줘야 한다. 우리 사회 전체가 소비를 줄이는 쪽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제주도연맹 부의장인 조씨는 고씨와 함께 농민 운동에 활발히 참여해왔다. 그동안 농민 운동에서는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인한 농가 소득 감소’ 정도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지만, 최근에는 ‘기후위기 대응 문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단다.
“매년 이상기후로 농가에서 수확을 못하는데 우리가 계속 날씨 탓만 할 수는 없잖아요. 정부에 기후 재난으로 인한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기후위기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어요.”
제주의 농민들은 예측 불가능한 날씨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감당하며, 대책을 마련하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의 농사가 기후위기에 무너지는 순간, 우리 겨울 먹거리도 사라진다. 제주만의 얘기가 아니다. 전국의 농촌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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