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1기 행정부 상대해본, 조현 전 유엔대사 인터뷰
[주간경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년 만에 돌아왔다. 미국에서 정권 교체를 당한 대통령이 정권을 직접 탈환한 역사는 제22와 제24대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랜드 이후 처음이다. 미국의 정권 교체에 맞춰 외교노선을 전환했던 나라들은 4년 만에 정책 재전환 시기를 맞았다. ‘가치’ 외교를 표방했던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에서 조 바이든으로 바뀌고 난 뒤 1년여가 지나 한국에서도 정권 교체가 있었다. 새로 등장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정부’가 함께 만든 관계를 재건·복원해야 할 대상으로 평가했다. 이제는 그때 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 할 상황이 됐다. 학계에서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트럼프식 외교를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가 상대해야 한다.
조현 전 유엔대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2017~2021) 4년 동안 한국에서 외교부 2차관, 1차관, 유엔대사 등을 지냈다. 40여 년의 외교관 생활 중 절반 가까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강대국들을 상대했다. 지난 1월 1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그를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지난 21일에는 서면으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먼저 조 전 대사에게 ‘정부가 트럼프 1기 행정부를 상대해본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그런 적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어땠나.
“한마디로 말하면 ‘예측 불가’였다. 종전 외교방식을 뒤집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제시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제의가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 방식이 미국 외교정책의 한 축을 이뤘다면 또 다른 한 축에 마이크 폼페이오, 존 볼턴과 같은 전통적인 관료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중된 측면도 있었다. 두 축이 작용-반작용을 거치며 그때그때 외교정책이 바뀌는 현상이 목격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해당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나.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담당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1기 행정부 때의 전통적인 네오콘 세력과는 차이가 있다. 2기 행정부를 구성하는 인물들 역시 미국의 분쟁 개입 축소 및 중국 견제라는 측면에선 1기 때 기조를 이어가겠지만, 이를 달성하는 전략 측면에선 차이가 있을 것이다. 1기 행정부 인물들이 전통적인 동맹, 협력 등의 외교방식에 치중했다면 2기는 비전통적인 방식에 좀더 치중할 수 있다.”
-비전통적 방식은 어떤 것인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거래적 방식이 중심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토 등의 전통적 동맹을 무조건 존중하기보단 사안별로 미국의 이익을 따져 깊숙이 개입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2기 행정부에는 미국 공화당 내에 있는 전통적 고립주의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같은 인물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상호작용해 어떤 결과를 만들지 예측하기 어렵다.”
-당장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압박받을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미국 대선 전부터 트럼프가 집권하면 분담금을 10배 이상 올릴 것이란 말이 많았지만 본격화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대비를 철저히 하되, 지레 겁먹고 미국에 먼저 의사 타진을 하거나 수세적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바이든 행정부와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협정을 체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유효기간도 많이 남았다(지난해 10월 2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방위비 분담금 인상률을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에 연동한 제12차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에 최종 합의했다). 우리는 평택 캠프 험프리스 부지 확장 및 기지 건설 비용의 90% 이상을 부담했고, 임대료도 받지 않고 있다. 또 나토 등 다른 미국 동맹국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분담금을 내는 만큼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조선업 등 미국 군수산업과 협력할 수 있는 지렛대 역시 갖고 있다. 최후 수단으로 방위비 분담금 산출 방식을 바꿔볼 것을 제안해볼 수도 있다. 현재 방위비 분담은 총액을 먼저 정하고, 이를 미국이 자율적으로 배분해 사용하는 ‘총액형’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를 주한미군 유지에 필요한 항목별 소요 비용을 산출해 한·미가 나눠 분담하는 ‘소요형’으로 바꿔보자고 제안할 수 있다. 다만 이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먼저 거론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사실상 과도정부 상태인 만큼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 중요한 결정을 미루자는 식의 전략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들의 협상 결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코리아 패싱(한국 배제)’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기간에 북·미 간 협상이 시작될 수도 있다고 보나.
“북한과 직거래를 시도할 가능성은 커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게 트럼프 대통령의 최우선순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동이나 유럽에서 진행 중인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이냐, 동맹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이냐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처지에서도 하노이 회담 때처럼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신중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한은 핵,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된 만큼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양측 모두 쉽게 협상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국내정치적 유불리를 제외하면 코리아 패싱을 이유로 북·미가 한반도 안정, 긴장 완화 협상을 하는 것에까지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코리아 패싱 우려는 우리가 빠진 상황에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거나 핵 문제가 굳어지는 것에 관한 것이지 그 반대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바라는 ‘한반도 안정’과 한국이 바라는 ‘한반도 안정’의 형태가 같은 것은 맞나. 미국의 북핵 문제 해법은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지칭했다.
“딜레마가 있다. 우리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과 핵을 두고 어떤 식으로 협상을 하든, 이를 완전히 거부하기도 어렵다. 외교는 냉엄한 현실을 정확히 읽고, 선택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희망을 외교정책으로 삼을 수는 없다. 결국 미국이 북핵 문제로 협상을 한다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완전한 비핵화를 지향해 달라’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 협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보나.
“가능성은 있다. 다만 이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등의 국제 여론도 결부돼 있다. 미국이 공공연히 핵 군축 협상을 하겠다고 나서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북·미 간 협상이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비핵화를 유일한 출구로 하는 ‘파이프 라인’ 속에 핵 협상을 넣는 것이다. 어떤 협상을 하든 최종 출구를 ‘완전한 비핵화’ 하나로 통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이 빠진 북·미 간 대화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없다.”
-남북관계를 개선해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낮추자는 지적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남북관계 개선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가 자연스럽게 낮아지는 것이지, 정책적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북관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 때를 반추해 보면,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을 끌어내고, 대화에 나서게 한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 이후 북·미를 중재해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 외교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전제로 두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자율적 공간을 찾아야 했는데 이는 그 당시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리외교를 하면서 국력을 키우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커지고 미국도 우리 의견을 경청하게 된다. 이를 통해 한국 외교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커지면, 안보 측면에서 대미 의존도도 자연스럽게 낮아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재집권을 꼭 나쁘게 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돈만 내면 한·미동맹도 지금보다 강화되는 것 아니냐는 것인데.
“한·미동맹 강화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미국과 가장 가까운 영국도 유엔에서 미국과는 다른 의견을 낸다. 한·미동맹이 미국과 같은 입장에만 서야 한다는 개념이 아니란 의미다. 트럼프 개인의 특성을 이용한 접근 방식도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행을 바라고 외교정책을 운용할 순 없지 않나. 사안별로 유불리를 쪼개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방위비 분담금처럼 우리가 일단 소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사안이 있지만, 통상 문제처럼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사안도 있다. 특히 관세 인상이나 한국 기업들이 받기로 돼 있던 보조금 삭감 문제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미국 측 결정을 수세적으로 전부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정부가 기업과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긴밀하게 논의해서 협상안을 만들고 동원 가능한 수단을 모두 활용해 적극적으로 협상해야 한다. 예를 들어 WTO(세계무역기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우리는 WTO 기준에 맞춰 매해 ‘쌀 의무수입’을 약 40만t씩 한다. 이중 30% 정도가 미국산이다. 이러한 사안들까지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대응에 나서야 한다.”
-트럼프가 반발할 수 있지 않나.
“우리 입장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것만으로 한·미동맹이 약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핵심 이익이 곧 미국의 이익과도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반대로 트럼프가 특정 부문에서 한국의 기여를 요구할 수도 있지 않나.
“중국을 봉쇄하는데 한국이 더 역할을 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미국도 쉽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도 덥석 받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한·미동맹 강화, 한·미·일 안보 협력 모두 필요하다. 다만 이것이 북·러 간 협력, 북·중·러 밀착을 만든다면 또 다른 문제다. 가치외교가 진영외교로 변질하면 한국 외교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반면 해적 퇴치나 기후변화 문제, 개도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 등을 요구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다만 ODA 지원도 단순히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 병원을 지어주는 등의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연계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아쉬운 것이 ODA 예산만 늘리고, 구체적인 세부 운용계획이 없어서 일선 현장에서 혼란을 겪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윤석열 정부가 허세를 부린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유럽과 다르다. 대북 지원에 나서야 할 수도 있어서 국제사회가 우리에게 과도하게 ODA 예산 증액을 요구해도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북한에 지원을 많이 할 때는 ODA 예산만큼 지원한 적도 있다. 기여도 국내 상황을 고려해서 늘려야 한다.”
-현 정부에 조언을 한다면.
“최상목 권한대행 체제는 본인들이 탄핵당한 정부라는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 외교에 쏟아졌던 비판을 성찰하고 정책적으로 너무 나간 부분은 완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황을 잘 유지해 다음 정부에 안정적으로 넘겨주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과도 정부 외교부 장관이 어디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한들 국제사회가 이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나. 차기 정부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기존의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한·미·일 협력처럼 이미 구성된 부분까지 무리하게 뒤집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한국이 필요한 것을 협력에 추가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수든 진보든 외교를 국내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윤석열 정부에게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이 정권 초기, ‘한·미관계 복원’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이다. 2021년 5월,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 미국에서 ‘어떤 불만도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런 상황을 이어받아 놓고 한·미관계를 복원한다고 하면 국내정치에 이용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