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공은 역학(疫學)이다. 오랫동안 물리학의 역학(力學), 명리학의 역학(易學)에 밀려 존재감이 없었는데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며 ‘역학조사’와 함께 전 국민에게 조금은 낯익은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천공스승, 건진법사, 아기보살 같은 분들이 나타나면서 역학(易學)에 또다시 밀리고 있다.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말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역학조사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보건학의 분과학문으로서 역학(疫學)의 본질은 인과성 규명에 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파헤치는 것이다. 질병의 원인이 뭔지 찾아내야 예방을 할 수 있고, 질병이 호전된 것이 정말 지금 투약 중인 신약의 효과인지 확인해야 치료제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일을 역학이 한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척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면 굳이 이를 직업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인이 있는데 사실은 그 요인 때문이 아니라 제3의 혼란 요인에 의해 결과가 나타났을 수도 있고,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의 시간적 선후관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예컨대 커피를 많이 마실수록 암 발생이 많아지는 현상을 관찰하고 커피를 암의 원인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담배를 피웠고 암의 진짜 원인은 커피가 아니라 담배였다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당뇨병 환자와 정상군을 비교했더니 정상군의 비만율이 더 높은 것을 보고 비만이 당뇨병의 ‘보호 인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당뇨병 때문에 체중이 줄거나 당뇨병을 진단받은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체중 감량을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후견지명(後見之明)으로 연구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할 수 있지만, 막상 연구 시작 단계에서 오류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여 연구를 설계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이런 복잡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역학에서는 방법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원인적 연관성’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들을 발전시켜왔다. 이 기준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시간적 선후관계다. 원인은 결과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앞선 예시처럼 막상 연구를 하다 보면 판단이 어려운 경우를 종종 만난다.
인과성 규명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으로서, 인과성의 고리를 의도적으로 꼬아버리는 이들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이다. 계엄 조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그 정도로만 살살 했다는 내란세력이 그 주인공이다. 국회를 폐쇄할 생각도 없었고, 전공의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처단한다는 포고령의 문구도 어차피 계엄이 금방 해제될 것이니 굳이 일부러 수정하지 않았단다. 그들은 이런 궤변을 생각해낸 자신들의 명석함에 스스로 반해버린 듯,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실패한 ‘결과’를 두고 마치 그것이 ‘원인’이었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분명한 ‘원인’은 계엄령이고, 그것이 원래 목표로 했던 ‘결과’는 민주주의의 종결이다. 계엄 포고령에 적힌 대로 의회와 정당 활동이 중단되고 집회·시위·결사,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사라진 세상이 바로 ‘그 원인’이 초래했을 ‘결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결과는 ‘다른 원인’에 의해 초래되었다. 그날 밤 국회 앞에서 군인들을 막아선 시민들, 국회 담장을 넘어 적극적으로 계엄령 해제 표결에 참여한 국회의원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한 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이 칼럼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정립한 인과론의 핵심은 ‘반-사실적(反事實的·counter-factual) 조건’이다. 시공간적으로 연접한 두 사건에서, 만일 선행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뒤이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그 선행 사건을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