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받아적는 자음과 모음 중에 하나라도 잃는다면 자연계의 연쇄 사슬이 돌발적으로 끊어진 미싱 링크처럼 그곳의 발음이 술술 새서 아무리 반듯한 생각을 하더라도 말의 빈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이 있어야 세계도 가능한 것.
이러한 자음 중에서 특히 리을(ㄹ)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저 리을이 없다면 이 세상의 의성어, 의태어가 이렇게 풍부할 수 있겠나. 천지간에 미만한 소리와 동작을 어떻게 다 살리겠는가. 빗소리, 바람 소리, 아득한 허공을 나는 철새들의 기척.
이런 리을은 구불구불한 골목 같기도 하고, 가늘가늘 내리는 빗줄기가 사나운 바람에 휘청거리며 그리는 궤적 같기도 한데, 그런 리을이 있어 이 세상은 스프링 같은 탄력을 마음껏 발휘하느니, 활활 끓는 리을의 행렬을 보라. 물, 불, 길, 술, 말, 발, 돌, 철 그리고 얼굴.
을사(乙巳), 올해의 간지에 유념하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리을(ㄹ)과 모양이 비슷한 한자 하나를 발굴했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는 ‘몸 己(기)’. 자기 자신이라는 뜻도 있는 이 한자는 ‘리을’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저 리을(ㄹ)과 몸(己)은 그 형태가 너무나 꼭 빼닮았다. 이 한자는 구부러진 것이 머리를 쳐들고 뻗으려는 모양을 나타낸다고 한다.(금성판, 활용옥편)
무릇 세상의 모든 ‘나’란 존재는 이런 몸(己)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나에게 나란, 나의 몸이란 어마어마한 대륙이다. 늘 함께 살고, 가까이에 있지만 못 가본 곳,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 너무 많다. 세계와 나, 그 사이의 미싱 링크야말로 혹 나의 몸이 아닐까.
다시 리을(ㄹ)을 지나 몸(己)으로 가 본다. 몸에서 머리카락과 손톱이 자라고 무덤에서 풀이 돋아나듯, 己에서 중간 획이 조금 자라나면 已가 되고 巳가 된다. 已(이)는 ‘이미, 벌써, 끝났다’라는 뜻이고 巳(사)는 ‘뱀’이다.
이제 을사년이다. 리을(ㄹ)에서 몸(己)까지의 거리처럼, 몸(己)과 뱀(巳)도 너무 가깝다. 뱀은 요물이기도 하지만 영물이기도 하다. 을사를 기념하며 올핸 몸의 중간을 횡단하는 허리띠 만질 때마다 뱀 생각을 해 볼까. 희망의 을사년으로 들어가면서 허벅지에 손가락으로 자꾸 써 본다. 己와 已, 乙(을)과 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