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화된 청년 남성’이란 환상서 빠져나오기

2025.02.10 20:55 입력 2025.02.10 21:03 수정

‘2030 남성의 보수화’란 이야기가 다양한 사건을 소환하며 거대한 해석을 낳고 있다. ‘극우 유튜버’들과 젊은 남성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 담을 넘어 기물을 파손하고 판사를 찾겠다고 난동을 벌였다. 탄핵은 지지하더라도, 야권 후보에 대한 지지에 있어 2030 남성의 호응이 적다.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광장 속에서 ‘응원봉’을 든 2030 남성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3년 전 2번 후보에게 투표한 20대 남성을 뜻하는 ‘이찍남’이란 꼬리표도 있다. 일련의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2030 남성들에 대한 형상을 강화한다. 초유의 비상계엄 과정과 이후 드러나는 사태의 전말에 대한 분노가 상승작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2030 남성 뚜렷한 보수색 관찰 안 돼

세 가지는 짚자. 우선 2030 남성들의 보수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현상만 보자면, 미국의 다수 젊은 남성들도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유럽연합(EU)의 많은 젊은 남성들은 주류 보수 정당 대신 극우 정당에 열광한다. 반대로 젊은 여성들이 민주당 또는 녹색당, 혹은 사회당 등 주류 좌파·진보 정당에 투표하는 것도 미국과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이다.

한국의 2030 남성들이 특별히 보수화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현상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면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유보하거나 철회하는 현상이다. ‘더 진보적’인 정치적 선택지도 이제는 희미하다. 미국에서도 전체 투표 관점으로 보면 트럼프가 표를 더 가져간 게 아니라, 카멀라 해리스로 가야 할 표가 줄었을 따름이다. 여기든 저기든 리버럴 정당에 대한 지지가 확연히 줄었다고 표현해야 한다. 가치 차원에서 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젊은 남성들은 성소수자 인권, 페미니즘, 이민 정책,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며 트럼프를 지지했지만, 한국의 남성들은 젠더 문제에 있어 이들보다 유보적이며 이민 정책, 기후변화 대응 문제에 대해 뚜렷한 보수적 태도가 관찰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2030 남성들이 단일한 무리인지 의문이다. 2030 남성들이 가장 많이 들어간다는 온라인 커뮤니티 펨코(fmkorea)와, 윤석열 마이너 갤러리에 접속하는 집단은 전혀 다르다. 예컨대 펨코는 내란 사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 주류다. 커뮤니티에 들어가 열심히 글을 읽고 댓글과 추천을 교환하는 행위도 소수에 그친다. 모든 세대가 그렇듯 젊은 남성들도 유튜브를 켜고 쇼츠를 주로 본다. 시청 채널도 파편화되어 있어 역설적으로 극우파 채널을 소비하는 2030 남성은 극소수에 그친다. 능력주의와 시험에 대한 극렬한 옹호는 계층적 쟁점에 그친다. 작년 2030 남성들에게 많이 회자되었던 영상 중 하나는 부상 군인이 로봇과 함께 재활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공화국 시민으로서 병영생활을 이행하는 동년배 청년에 대한 공감은 여전히 체제에 대한 합의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민주주의 정치질서에 대한 그림에 대한 합의가 다를 뿐이다.

그들과 적극적 마주침이나 연결 필요

‘워키즘’ 비판이나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정책에 대한 공격에 그 자체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규범론적인 담론 비판은 2030 남성에 대한 판단과 별개여야 한다. ‘보수화된 청년 남성’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에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특별한 효과가 없는 게 서구와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러스트벨트의 젊은 레드넥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트럼프주의의 폭력성과 정치적 문제점을 비판한다 한들, 돌아오는 것은 세계의 쪼개짐뿐이다.

현재는 2030 남성 다수가 누구인지, 그들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이해나 이들을 포괄할 공동의 가치·이념적 틀·전략은 없고, 꾸짖음뿐이다. 비판하는 주체와, 변화해야 한다고 간주되는 주체가 마주치지 않으면 세계는 쪼개질 것이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파편화된 세계가 오프라인이라고 다를 리 없다.

보수화가 걱정이라면 이들의 이념과 정치적 선호가 굳어버리기 전, 차단이 아닌 적극적인 마주침과 연결이 필요하다. 좌·우 클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당의 본원적인 청년정책에 대한 방향성 성찰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청년 남성들을 더 두텁게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하며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응원봉’이 만들어낸 ‘다시 만난 세계’가 고립되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확장되려면 말이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많이 본 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