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조세를 절반으로 감면하라”···조선시대 왕이 왕릉을 찾은 이유는

2025.02.12 15:16 입력 2025.02.12 21:05 수정

고양 서오릉 내 명릉. 국가유산청 제공

고양 서오릉 내 명릉. 국가유산청 제공

“친히 권원릉(健元陵)에 제사를 올리고 동교(東郊)에 거동하여 농사 형편을 살펴보았다.”(세종실록)

“길가의 부로(父老)에게 고통을 물어보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오래된 환곡이라고 대답하였다.”(정조실록)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 경기도 구리에 위치한 건원릉을 다녀오던 세종은 관가의 작황을 살펴보았다. 정조는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오는 길에 고을의 백성들에게 직접 고충을 물어보기도 했다.

조선시대 국왕이 선대 왕이나 왕비의 능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는 ‘능행’(陵幸)은 국왕의 정치적 정통성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동시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작황과 고충을 묻는 적극적인 대민정치의 장이기도 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는 12일 ‘조선시대 능행 심화 연구용역 보고서’를 공개하고 조선시대 국왕들이 능(陵), 원(園), 묘(墓) 등 왕릉군 방문 사례를 정리했다. 원과 묘는 왕릉보다 낮은 단계의 무덤을 일컫는다.

고양 서오릉 내 명릉으로 향하는 길. 국가유산청 제공

고양 서오릉 내 명릉으로 향하는 길. 국가유산청 제공

능행은 국왕 개인이 도성 밖으로 행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적지 않은 시위 병력과 수행 인원이 뒤따랐는데, 세종 때에는 4100명의 병력이 동원되기도 했다. 능행에 시위하는 병력의 규모는 조선 초 4000여 명에서 조선후기 1000명 전후로 줄었다.

능행 때 국왕들은 사냥, 진법 훈련 등 군사 활동을 벌였다. 사냥터를 넓게 둘러싸고 사냥할 짐승을 몰기도 했고, 매사냥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태종과 세조가 매사냥을 좋아했다. 15세기까지 능행 시 군사 훈련으로 사냥이 이뤄졌고, 점차 진법훈련이 시행됐다.

능행은 대민 친밀성을 강조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부역과 세금 감면이 자주 이뤄졌다. 정조는 장릉을 둘러보고 난 후 백성들의 조세를 절반 감면해주고, 구휼미를 내리기도 했다. 백성이나 관리들을 불러 고을의 정치와 폐단에 대해 묻는 순문은 영조대 이후 본격화됐다. 영·정조대 군주들이 표방했던 ‘애민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보고서는 “조선 전기 능행이 국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조선 후기의 경우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왕릉군으로 총 211회 능행을 했다. 가장 많이 찾은 곳은 권원릉을 비롯한 9개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으로 총 89회 방문했다. 그 다음은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서오릉으로 총 63회 찾았다.

특히 조선 후기 능행이 잦아졌는데, 이는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 공간이었던 종묘에 비해 부차적 기능을 수행했던 왕릉이 17세기부터 의례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띠게 된 것과 무관치 않다. 보고서는 “종묘는 야간에 의례가 진행되고 제한된 인원이 현장에 참여하는 반면, 왕릉은 주간에 국왕이 이동하고 의례를 해 국왕의 존재를 노출할 기회가 됐다”며 “무덤이 활용되는 민간의 정서를 통치에 활용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왕릉 관리와 운영 상황을 기록한 능지(陵誌) 등 옛 문헌을 바탕으로 시기별 능행 추이, 세부 경로, 군병 배치 및 규모 등을 분석한 내용을 실었다.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해 대표 능행 사례 4건을 표현한 지도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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