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대설특보가 발효된 12일 서울 마포구 신촌역 인근, 하얗게 날리는 눈 사이로 A씨(87)는 우산도 없이 손수레에 상자를 쌓았다. 이날 오전 3시부터 거리에 나왔다는 그는 정오에 평소보다 이른 귀가를 준비 중이었다. “월요일에도 길이 미끄러워서 넘어졌거든. 원래 손수레 4번은 채우는데, 더 미끄러워지기 전에 오늘은 들어가려고.” A씨는 키보다 높게 쌓은 상자들을 가리키며 “이 정도면 1만원 정도 받겠다”고 말한 뒤 고물상으로 조심히 손수레를 끌었다.
지난달 말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눈폭탄’ 소식에 도심 곳곳에서 긴장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빙판길과 도로 살얼음에 유의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일상이 됐고, ‘거리의 노동자’들은 “다칠 일 없이 겨울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건물과 도로를 관리하는 노동자들은 눈 내리는 날 평소보다 배로 바쁜 하루를 보낸다.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 경비원 권정철씨(78)는 12일 오전 9시쯤 염화칼슘을 포대째 끌고 다니며 아파트 단지 도로에 뿌렸다. 그는 “오늘 오전 5시 반에도 뿌렸는데, 눈이 영 잦지 않아 또 뿌리는 것”이라고 했다. 혹여 일찍 나선 주민들의 출근길이 얼어붙을까 봐, 경비원이 관리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기에 부지런히 나왔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인근 한 건물의 청소노동자 전모씨(55)는 입구 회전문을 몇 바퀴씩 돌며 대걸레질을 했다. 신발의 눈이 떨어져 생기는 검은 얼룩을 훔치던 그는 “평소보다 훨씬 자주 걸레질을 했다”며 “눈 내리는 날은 끝나고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고 했다.
도심 구석구석을 누비는 물류회사 운전기사들은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화물 운전기사 이주석씨(63)는 “큰 도로는 제설이 금방 되지만 새벽 골목길이 무섭다”며 “항상 어는 다리 위는 늘 조심한다”고 했다. 그는 집이 오르막에 있어 눈이 내린 뒤 귀가할 때마다 “차가 못 올라갈까 걱정”이라고 했다.
경기도 광주를 오가며 유제품을 운송하는 화물기사 B씨(57)는 “(눈이) 싫은 것을 넘어 두렵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말 경기 남부에 집중됐던 ‘첫눈 폭설’ 때 아예 배송을 못 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 오는 게 지긋지긋하다. 얼른 겨울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달노동자들에게 눈 오는 날은 ‘위기이자 기회’다. 길이 위험한 만큼 주문이 늘어 일감이 많아진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 거리에서 만난 배달노동자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음식 배달을 마치고 나온 한 라이더는 “눈이 오면 더 바쁘니 시간이 없다”며 바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25년 차 퀵서비스 기사인 김용석씨(52)는 “수요도, 단가도 높은 날이라 무서움보단 욕심이 앞서기 쉬운 날”이라고 했다. 12일 오전까지 10여건의 배달을 마쳤는데, 평소보다 3~4건은 더한 것이라고 했다. 오토바이 스로틀(출력장치)을 당기려는 손을 막는 것은 집에 있는 가족들이다. 식구를 생각하며 “천천히 급하지 않게 다니려 한다”는 그의 오토바이에는 ‘교통신호 준수한 사람’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