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게 얽힌 우리 삶, 소설로 풀어냈죠

2025.02.12 16:57 입력 2025.02.12 21:06 수정

박혜진 다람출판사 대표가 7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박혜진 다람출판사 대표가 7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방송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고 전달하는 삶을 살았어요.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꽤 많이 그리고 깊게 얽혀 있었던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때마다 제 마음도 함께 일렁였죠. 그 경험들이 결국 지금의 ‘얽힘’으로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뉴스 앵커,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DJ.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온 박혜진 다람출판사 대표가 지난 1월, 첫 한국문학 프로젝트 ‘얽힘’ 앤솔러지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 시작을 알린 첫 책 <봄이 오면 녹는>에는 성혜령, 이서수, 전하영 작가가 참여했다.

이 앤솔러지는 물리학 개념인 ‘양자 얽힘(Entanglement)’에서 착안했다. 박 대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독립적일 것 같은 존재들도 보이지 않지만 서로 연결이 돼 있고 얽혀 있다는 개념이다”라고 설명하며 이러한 개념을 소설로 구현해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 불가사의한 물리학 이론이 문학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겉보기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느슨하거나 촘촘하게 연결돼 있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 삶이 각자 독립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런 연결의 순간들을 소설로 담아보고 싶었죠.”

‘얽힘’ 시리즈는 단순히 하나의 테마를 공유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작가들의 작업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세 명의 작가는 각자의 작품을 독립적으로 집필하면서도 긴밀하게 소통하며 세계관과 소재를 공유했다. 서로의 작품 속 공간과 키워드를 자유롭게 차용하고, 대화를 통해 연결의 지점을 찾아갔다. 흔히 소설 쓰기는 고독한 작업이라 여겨지지만, 이번에는 활발한 소통 속에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오가며 새로운 방향과 깊이가 더해졌다.

“작가들끼리 단톡방도 있고 관계가 끈끈해요. 처음에는 ‘얽힘’이라는 큰 주제 아래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요. 만나자마자 ‘회의 시작’ 이렇게 진행되는 게 아니라 일상의 고민이나 작업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얽히게 되죠. 그렇게 ‘얽힘’이 더 촘촘해지면 편한 상태가 되면서 아이디어도 더욱 적극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얽힘’ 앤솔러지 1기 <봄이 오면 녹는>. 다람출판사 제공

‘얽힘’ 앤솔러지 1기 <봄이 오면 녹는>. 다람출판사 제공

1기 <봄이 오면 녹는>의 주제는 ‘손절’이었다. 작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던 중, 누군가 이 단어를 화두로 던졌고, 자연스럽게 시리즈의 주제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성혜령 작가의 ‘나방파리’, 이서수 작가의 ‘언 강 위의 우리’, 전하영 작가의 ‘시간 여행자-처음 한 여행과 다르게 여행하는 것’이 완성됐다. 이 작품들은 ‘손절’을 단순한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시대와의 단절 등 다양한 시선으로 확장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손절’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바라보며, 자신이 맺고 끊어온 관계들과 내면을 돌아보는 계기를 얻게 된다.

작가들에게도 이 창작 방식은 색다른 도전이었다. 이서수 작가는 책에 수록된 코멘터리에서 “이번 작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얽힘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순간이었다”라며 “한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른 작가의 소설에 나타났을 때,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세계와 존재하고 나서의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라고 말했다.

박 대표 역시 작가들이 서로의 초고를 공유하고 수정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이들이 점점 더 얽혀가는 과정 자체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작가분들도 기존의 방식과 달라 낯설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세 작가 모두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 또한 이 ‘얽힘’을 반기고 좋아해 준다고 느꼈어요.”

방송사 앵커로서의 탄탄한 경력을 쌓아왔던 박 대표는 2014년 남편과 함께 다람출판사를 설립했으며, 2021년부터 경영 전면에 나섰다. ‘얽힘’ 앤솔러지는 그의 첫 한국문학 프로젝트로 이미 2기, 3기 출간도 준비되어 있다. 2기에는 김이설, 이주혜, 정선임 작가가 3기에는 서장원, 이선진, 함윤이 작가가 참여한다. 많은 작가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와 6기까지의 라인업이 벌써 구성된 만큼, 앞으로도 ‘얽힘’ 시리즈를 통한 다양한 문학적 실험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문학을 오래 사랑해온 독자로서, 언젠가는 꼭 한국소설을 출간하고 싶었어요. 이번 시리즈를 시작으로 꾸준히 한국문학을 출간할 계획이고, 중·장편 소설 출간도 준비 중입니다.”

그는 문학이 가진 힘을 믿는다. 문학은 개인의 내면을 열고, 타인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 매개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요.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타인의 삶을 통해 그 얼음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해봤을 거예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그런 순간을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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