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 사고는 여행 첫날부터 일어났다. 엄마와 나는 동시에 실직한 기념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새해 첫날이었고 우리는 목욕재계하기 위해 타이베이 외곽의 온천마을에 묵었다. 막 온천에서 나와 느긋하게 몸을 뉘려던 찰나 엄마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아파. 다리가 아파.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했다. 넘어진 것도 부딪힌 것도 무언가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무언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달려가서 문제 부위를 주물러댔다. 문지르고, 비비고, 비틀어도 보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혼비백산이었다. 1월1일부터 타국에서 알 수 없는 마비 증상을 겪는 엄마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병원은 있나? 말은 통할까?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몇시지? 주마등 스쳐가듯 끔찍한 생각들이 이어졌다. 통증은 점점 심해져 엄마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엄마는 당장 가방을 가져오라 외쳤고 가방을 집어 채서는 거꾸로 들어 물건을 바닥에 전부 쏟아냈다.
십원짜리 동전과 백원짜리 동전이 수도 없이 떨어졌고 입에 뿌리는 민트 스프레이와 면봉 한 봉지, 반찬통과 손수건, 옷핀 한 묶음과 일본 지폐가 여러 장 흩어졌다. 짐을 싸라고 했더니 집을 싸 온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펜처럼 생긴 작은 사혈침이 있었다. “이거야!” 엄마는 나에게 그 펜을 쥐여주고, 양손과 양발 끝을 인정사정없이 따라고 지시했다.
나는 과연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이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마의 손바닥을 힘껏 주무르며 정확히 손톱 밑 중앙 자리를 더듬어 침을 쏘기 시작했다. 갈색에 가까운 검붉은 핏방울이 동그란 구 모양으로 맺혔다. 누군가의 손바닥과 발바닥을 그렇게 간절하게 붙들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보통의 펜보다 조금 두꺼운 그것을 앞으로도 자주 손에 쥘 것만 같은 예감을 피할 수 없었다.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에 스무개의 핏방울이 맺혔고, 놀랍게도 사건은 그 이후 진정되었다. 엄마는 통증이 멎은 후 기절하듯이 잠들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기적에 감사드려야 해서였다. 나는 막 시련에서 구원받은 차였고 ‘언제나 사혈침을 가까이 둘 것’이 좌우명이 됐다. 나는 귀국 일자에 맞춰 집으로 사혈침을 주문했다.
놀랍게도 여행은 이어졌고 다음날은 버스 투어의 날이었다. 버스를 가득 채운 여행객들 대부분이 가족 단위였다. 가이드는 이동하는 긴 시간 동안 버스 앞에 서서 우리가 가는 목적지의 역사와 소문, 포토존까지 쉬지 않고 설명을 늘어놨다.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버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엄마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어디야?” 나는 방금까지 들었던 내용을 엄마에게 다시 통역했다.
버스 투어는 신속함이 생명이었는데 도착하는 동시에 순식간에 버스를 빠져나가야 했다.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해서 엄마는 겉옷을 꺼내야 했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캐리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엄마가 캐리어를 뒤져 옷을 찾아 입었을 때는 일행을 완전히 놓친 뒤였다. 그래봤자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길을 가던 다른 한국인 가이드를 붙잡고 우리 가이드 이름을 대며 사정을 말했고 한참 뒤에야 일행을 찾았다.
나는 금방 깨달았다. 패키지 투어는 걸음이 느리고, 말귀가 어둡고, 행동이 굼뜬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여러 곳의 관광지를 들렀지만 내가 본 것이라고는 엄마의 발끝뿐이었다. 뒤처지지 않는지, 길을 잃지 않는지 살피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 설명하느라 패키지 투어 안의 패키지 투어가 되고 있었다. 우리는 먼 곳으로 여행을 왔지만, 어쩐지 내 머릿속에는 내내 엄마의 손끝과 발끝만 어른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