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원효 스님이 <금강삼매경론>을 해석할 때 이런 비유를 들었다. 어느 날 환술사가 뛰어난 환술로 호랑이 한 마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환술로 만든 호랑이가 너무나도 생생해 그는 환술 호랑이를 실물이라고 믿게 되었고, 마침내 그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인간의 망상을 경계하는 이 비유는 지금 우리 시대의 교묘한 거짓 선동과 그에 사로잡힌 극단적 확증편향을 떠올리게 한다.
12·3 비상계엄 이후 사람들의 상심한 마음이 선연하게 보인다. 경계를 뛰어넘어 차별 없는 연민과 사랑을 화두로 품고 있는 수행자의 눈에 멍들고 찢겨 상처 난 마음이 내지르는 절규가 아프다. 아비규환의 지옥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이런 상실의 시대를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힌 윤석열과 그의 추종자들이 후퇴시킨 민주주의 회복이 시급하다. 비 온 뒤에는 땅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야 하고, 소를 잃고 나서는 외양간을 다시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터이고 소는 후대까지 계속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한 인과법에 의하면 어떤 현상이나 결과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조건들이 있다. 그 조건은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요 원인과 여러 부수적 요건들이 결합해 가공된 결과를 만들어낸다. 4·19 혁명,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이룩한 고귀한 민주주의가 퇴행하려는 지금, 그 원인을 시민 유권자에게서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국민은 늘 옳다’ ‘국민 눈높이에 맞춘다’라는 위정자들의 입에 발린 말로 작금의 사태에 대해 시민 유권자가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는 주권을 잘못 행사해 자격 미달의 정치인에게 부당한 권력을 쥐여준 국민에게도 권력 남용과 오용의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투표 행위로 권력을 선출하는 시민 주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기계적인 중립에 갇혀 촛불광장과 태극기광장의 모든 시민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과연 옳은가. 사건과 맥락을 통찰하지 못한 양비론은 부당한 권력자에게 호시탐탐 반전의 기회를 줄 뿐이다. 비상계엄이 반헌법적 불법임이 너무도 명백한데 이를 부정하면서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그 많은 사람에게 주권자로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믿는다면 경악할 현상이다. 이들은 어째서 말도 안 되는 비상식의 사고를 하고 극악스러운 욕설과 폭력을 행사할까. 그 연유를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망상에 기반한 행위라고 한다. 망상이란 자기의 신념과 가치, 자기 합리화의 방어기제, 결핍과 분노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해 자가 생산하고 발전하는 허구적 의식세계이다.
우리는 동일한 시공간에 비슷한 모습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저마다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 심리학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물을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인간은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로 보고, 천상의 신들은 맑은 수정으로 본다. 어류들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집으로 보고, 굶주림에 시달린 아귀들은 피고름으로 본다.
왜 아귀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볼까. 아귀다툼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귀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 그 탐욕이 채워지지 않아서 생기는 증오심, 탐욕과 증오심에 가려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견해를 가진 어리석은 존재를 가리킨다. 그들은 증오와 자기 집착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만드는 망상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다. 작금의 상황이 바로 환술로 만들어낸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형국이다.
집단 망상의 광기가 가득한 광장, 그 광장에 선 사람들의 오염되고 찢긴 마음을 보는 것이 서글프다. 허구적 망상은 눈을 뜨고서 꾸는 꿈이다. 꿈이 꿈인 줄 알고 깨어나야 비로소 진실과 화해의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