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속도로, 설국을 달리다…겨울이 가기 전에, ‘V-train’

2025.02.15 09:00 입력 2025.02.15 09:03 수정
분천·양원·승부·철암 | 글·사진 김강수 여행작가

시속 30㎞ 여유의 맛 백두대간 협곡열차

시속 30㎞로 백두대간을 달리는 협곡열차(V-train)는 경북 영주에서 출발해 강원도 태백 철암역까지 영동선을 운행한다.

시속 30㎞로 백두대간을 달리는 협곡열차(V-train)는 경북 영주에서 출발해 강원도 태백 철암역까지 영동선을 운행한다.

겨울 하루 여행을 위해서는 약간의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일단 기차에 몸을 실어보자. 새벽 5시45분, 청량리역에서 영주역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기차에서 아침을 맞는 기분이 상쾌하다. 출발할 때는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해가 뜨면 깜깜한 방에 불을 켠 듯 세상이 온통 환하다. 백두대간을 시속 30㎞로 달리는 협곡열차에서 선물 같은 하루가 펼쳐진다.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는 경북 영주에서 출발해 강원도 태백 철암역까지 영동선을 운행하는 관광열차다. 주요 역에 10분 정도 정차하지만 산타마을로 유명한 분천역을 좀 더 둘러보기 위해 영주역에 내려 무궁화호로 갈아탄다. 창밖을 보니 KTX와 속도 차이가 느껴진다. 시속 300㎞에서 100㎞로 속도가 3분의 1 줄자 풍경은 3분의 1만큼 더 눈에 들어온다.

석탄 산업 활황기를 추억하는 철암 삼방동 전망대 조형물.

석탄 산업 활황기를 추억하는 철암 삼방동 전망대 조형물.

산타는 떠나지 않아요. 분천역

1970년대 목재 수송의 중심지로 호황을 누리던 분천역은 벌채업이 쇠퇴하면서 한적한 시골역이 되었다. 잊히던 오지 마을의 간이역은 백두대간협곡열차가 운행을 개시하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분천역은 협곡열차의 실질적인 시발역으로 스위스 빙하특급열차가 출발하는 체어마트(체르마트)역과 결연을 하고 역 한쪽을 스위스 샬레 분위기로 바꿨다. 이후 역사와 주변을 산타 조형물과 대형 풍차, 이글루, 트리 등으로 꾸미면서 산타마을로 재탄생했다. 하루 10명도 오지 않던 오지 마을의 간이역은 이제 연간 10만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산타마을로 탈바꿈하며 연간 10만명이 찾는 분천역.

산타마을로 탈바꿈하며 연간 10만명이 찾는 분천역.

분천마을은 일 년 내내 따뜻하고 아늑한 크리스마스다. 분천사진관에서는 분천역의 역사가 담긴 사진과 영상을 볼 수 있다. 벽난로와 크리스마스 소품들로 꾸며진 산타우체국은 근사한 촬영 장소다. 무늬만 우체국인 것도 아니다. 엽서를 써서 빨간 우체통에 넣으면 내년 크리스마스에 받을 수 있고, 노란 우체통에 넣으면 여행이 끝난 뒤 받을 수 있다.

그동안 한겨울과 한여름에 산타마을을 운영했던 분천역은 오는 4월부터 ‘겨울왕국’을 선보인다. 산타체험관과 사계절 썰매장(여름엔 물썰매장, 겨울엔 눈썰매장), 크리스마스 콘셉트의 전망대가 들어서고 미니 기차가 마을을 달릴 예정이다.

아침해보다 일찍 청량리역서 출발
영주역에서 무궁화호로 일단 환승

1년 내내 성탄인 분천역 산타마을
주민들이 직접 지은 기적의 양원역
여행자 북적이는 승부역 간이장터
모두 지나면 ‘석탄의 메카’ 철암역

백호 닮은 열차는 오늘도 느릿느릿
눈 덮인 산과 협곡, 눈에 가득 담자

4인용 좌석이 창밖을 향해 배치된 협곡열차 내부.

4인용 좌석이 창밖을 향해 배치된 협곡열차 내부.

백호가 돌아왔다. 별을 품고서

분천역 철로 위로 하얀 바탕에 검은 수염을 한 협곡열차가 들어온다. 백두대간을 누비던 백호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차에 오르자 일반 열차와는 다른 좌석 배치가 눈에 띈다. 2인용 좌석은 일반 열차와 다르지 않지만 4인용 좌석은 창밖을 향해 있다. 좌석이 꽉 찰 무렵 열차가 출발한다. 백두대간협곡열차는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깊은 산골을 지난다. 협곡과 절벽이 맞닿은 철길을 따라 달린다. 시속 30㎞로 느린 속도 덕분에 청정 자연의 웅장함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산과 계곡을 하얗게 덮고 있다. 고즈넉한 겨울 풍경에 몸도 마음도 편안해진다. 터널에 들어가자 천장에 그려져 있던 별과 행성들이 빛을 발한다.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나온다. 천장에는 별뿐만 아니라 선풍기도 매달려 있다. 여름에는 에어컨 대신 선풍기가 돌아간다. 창으로 들어오는 계곡의 바람까지 더해지면 겨울과는 또 다른 협곡열차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계절의 속도로, 설국을 달리다…겨울이 가기 전에, ‘V-train’

세계에서 가장 작은 역, 양원역

몇 개의 산과 계곡을 지나 협곡열차가 양원역에 멈춘다. 양원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역사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역이다. 양원역 인근 원곡마을 주민들은 대중교통이 없어 외지로 한번 나가려면 다음 역인 승부역에 내려 기찻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평지의 기찻길을 걷는 것도 힘들지만 산간지역 기찻길은 터널과 다리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 위험천만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이에 주민들은 민원을 넣는 것은 물론 직접 돈을 모아 임시승강장을 만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작고 허름한 건물이 특별하게 보인다. 2021년 개봉한 영화 <기적>은 주민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양원역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다. 잠시 승강장을 걸으며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눈에 담는다.

여행자들로 활기가 넘치는 승부역 간이장터.

여행자들로 활기가 넘치는 승부역 간이장터.

간이장터의 정겨운 풍경, 승부역

다음 정거장인 승부역에는 소원을 빌면 한 번은 들어준다는 용관바위가 있다. 안내를 듣고 모두 소원을 빌러 갈 줄 알았지만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따로 있다. 여행자들은 간이장터에서 따뜻한 어묵 국물을 마시며 잠시 몸을 녹인다. 감자부침, 메밀전병도 보인다. 산송이, 산나물, 잡곡류 등 지역 농산물도 판매한다. 먹고 구경하고 흥정하는 여행자들로 간이장터는 금세 활기가 넘친다. 승부역이 있는 마을 역시 험준한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과거 이곳의 역무원이 남긴 글만 봐도 얼마나 두메산골인지 알 수 있다.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다.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탄광마을의 흔적, 철암역

백두대간협곡열차 마지막은 철암역이다. 석탄 산업이 한창 꽃을 피울 때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탄이 철암역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 중심에 있던 철암역은 강릉역보다 10배나 많은 역무원이 근무했다고 한다. 당시 잘나가는 탄광촌에서는 개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는데, 철암에서는 10만원짜리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이뤘다. 철암역에서 나와 길을 건너 좌측으로 100m만 걸어가면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철암탄광역사촌이 나온다. 무심코 걷다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페리카나, 호남슈퍼, 진주성 등 오래된 간판이 있는 허름한 건물촌이 바로 그곳이다. 광부들이 쓰던 안전모와 장화, 근무복도 전시돼 있고 당시 영수증과 상장, 통지표, 월급명세서 등도 보인다. 철암과 석탄 산업의 역사에 관한 내용도 읽을 수 있고 직접 연탄을 만들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역사촌 뒤 삼방동 전망대에 올라가자 역사촌의 뒷모습과 철암역두선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된 철암역두선탄장은 국내 최초 무연탄 선탄시설로 여전히 가동 중이다. 까만 산 위에 내린 하얀 눈이 유난히 밝게 빛난다.

겨울이 떠나기 전에

백두대간협곡열차는 목적지를 향해 빨리 달리지 않는다. 대신 눈 덮인 산과 협곡이 품은 자연을 하나씩 보여주며 잠시 머물 기회를 준다. 이 겨울이 가기 전 협곡열차에 몸을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 시속 30㎞가 선사하는 특별한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 여행작가의 팁

계절의 속도로, 설국을 달리다…겨울이 가기 전에, ‘V-train’

백두대간협곡열차는 목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운행한다. 영주역에서는 오전에 한 번, 분천역에서는 오후에 출발하는 열차가 한 번 더 있다. 철암역에서는 하루에 두 번 운행되는데 오전에 출발하는 열차는 분천역이 종착역이고 오후에는 영주역이 마지막 역이다. 역마다 정차하는 시간이 다르니 안내 방송을 잘 듣고 움직이면 된다. 참고로 철암역까지 가는 동안 머무는 시간이 돌아올 때보다 몇 분 더 기니까 갈 때 미리 봐두는 것이 좋다. 주말은 물론 평일도 표가 금방 매진되니 미리 예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철암탄광역사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되며 첫째, 셋째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별도 입장료는 없으나 연탄 만들기 등 체험활동에는 비용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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