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동물들도 신이 날까?

2025.02.15 09:00
김정호 청주동물원

동물의 눈을 통해 바라본 ‘눈 오는 날’ 풍경

눈 내린 풍경 속 야생 동물들은 그 자체만으로 동화 속 한 장면이 된다. 그들은 추운 겨울도 활동량을 유지하며 잘 견뎌낸다.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눈 내린 풍경 속 야생 동물들은 그 자체만으로 동화 속 한 장면이 된다. 그들은 추운 겨울도 활동량을 유지하며 잘 견뎌낸다.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추운 겨울에는 여름이 아쉽지만 난 겨울에도 겨울이 좋다. 출근길 여느 직장인과는 반대로 도시가 아닌 산으로 향한다. 저 멀리 상당산성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은 대개 추운 날이다. 창문을 열자 달리는 차 안이 맑고 찬 공기로 가득 찬다. 크게 들여 마신 소나무숲의 녹색 공기는 오즈의 마법사가 사자에게 준 녹색 물처럼 폐포를 채워 오늘 벌어질 알 수 없는 일에 기대와 용기를 준다.

나만큼 겨울을 좋아하는(사실 잘 견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동물은 역시 토종동물들이다. 눈이 오는 날은 보통 오후에 나오는 수달들도 아침부터 활동량이 많다. 하얀 눈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찍은 물갈퀴 달린 발자국이 어지럽다. 온몸으로 물을 저어놓아 수달의 수영장도 얼 틈이 없다.

새끼 때 농장에서 구조된 반달가슴곰들은 이제 사람 나이로 30대 청년이다. 겨울철 상의를 탈의하고 운동하는 국가대표 상비군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레슬링을 하고 있다. 제한된 공간 내 수컷들은 이런 식의 힘자랑이 서로의 공격성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두 곰의 열기로 방사장 앞마당 눈은 녹아 질퍽하다.

스라소니의 긴 수염은 공기의 흐름 마저 감지하도록 예민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도 느낄 수 있겠지.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스라소니의 긴 수염은 공기의 흐름 마저 감지하도록 예민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도 느낄 수 있겠지.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고양잇과 스라소니의 긴 수염은 예민하다. 이 포식자는 수염 덕분에 공기 흐름을 감지해 사냥감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숨이 흐르는 숨통을 재빨리 찾아 끊을 수 있다. 이 능력은 육식동물의 자비로 미화되곤 하는데 숨이 멎은 뒤 몸을 취하게 해 먹이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웅크린 스라소니가 각각의 수염에 떨어지는 눈송이의 무게를 가늠해보고 있다.

시베리아 호랑이(한국호랑이의 정식 명칭)는 내리는 눈에 감응이 적어 보인다. 야생이라면 반경 200㎞의 눈밭 사냥터가 일상이므로 이 정도 눈은 큰 자극이 아닐 것이다. 반면 친척뻘인 아프리카 사자들은 눈 자체가 신기하다. 동물복지사들이 공들여 만들어준 눈사람의 머리를 건드려 떨어뜨리더니 큰 앞발로 조심스럽게 굴리며 논다. 귀하게 얻은 장난감의 형태를 유지해 되도록 오래 가지고 놀고 싶은 눈치다. 한참을 놀고 나서는 발이 시린지 온기가 있는 내실로 들어가 버린다.

다양한 색을 볼 필요가 없는 산양의 눈은 다른 계절에도 겨울과 같은 대숲을 보았을 것이다.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다양한 색을 볼 필요가 없는 산양의 눈은 다른 계절에도 겨울과 같은 대숲을 보았을 것이다.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눈 내린 대숲에 서 있는 산양은 한 폭의 수묵화다. 다양한 색을 볼 필요가 없는 산양의 눈은 다른 계절에도 겨울과 같은 대숲을 보았을 것이다. 겨울은 사람과 산양이 동일 공간에서 같은 풍경을 보는 유일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어 산양이 사는 방사훈련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린 산양을 위해 함께 살게 한 할머니 흰 염소는 눈 바탕과 겹쳐 스스로 풍경이 되어 버렸다.

10여년 전 겨울, 일본 삿포로 공항 착륙을 위해 선회하는 비행기 창밖으로 바다 결빙들이 파도에 움직이며 반짝였다. 홋카이도에 있는 동물원으로 출장 가는 길이었다. 인구 30만 소도시의 아사히야마 시립동물원은 행동전시(야생을 살기 위한 본연의 행동을 전시)라는 콘셉트로 도쿄 우에노 동물원의 방문객 수를 넘어섰고 일본 내 동물원뿐 아니라 기업 경영진이 참고하는 모델이 되었다. 당시 국내도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동물원 찬반 논쟁이 사회적으로 떠오르던 시기였고 운영 주체가 동일한 국내 시립동물원들은 아사히야마 사례를 궁금해했다.

홋카이도를 가로지르며 아사히야마를 향해 가는 길은 눈빛으로 형형한 자작나무숲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먼 숲속에서 쉬고 있는 야생 여우를 보았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처럼 금빛털을 지니고 있었다. 눈에 묻혀도 도로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들과 제설차량의 행렬이 잦은 폭설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행 가이드는 도로 주변에 밭농사를 많이 짓는데 적설량이 많지 않으면 눈을 녹이기 위해 퇴비를 살포한다고 했다. 퇴비의 발효열로 도로의 눈을 녹이면 밭으로 흘러들어가 작물 성장에 도움을 준다니 농촌 지역에 적용할 만한 좋은 아이디어였다.

기사를 통해 알려진 동물원장은 작업복에 열쇠 꾸러미를 차고 나타났다. 한국의 특별한 손님들이라고 반가워하며 동물원을 돌며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었다. 유리 터널에 들어가자 바깥 하늘과 겹쳐 새처럼 날고 있는 펭귄이 보였다. 실내에 세워진 유리 기둥은 외부 수조와 연결되어 호기심 많은 물범이 내려와 기둥 안에 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천장의 투명창을 통해 하마의 수영하는 다리 동작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색적인 외국동물의 행동전시를 위해선 많은 시설 투자가 선행돼야 해서 당장 우리 동물원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고 오는 길에 보았던 숲속 야생 여우만 자꾸 생각이 났다.

청주동물원은 2019년부터 동물들이 사는 곳을 개선하고 있다. 과거부터 꾸준히 거론됐던 동물원 이전 비용 수천억원에 비하면 100분의 1 정도의 예산이 들었다. 이런 비용 절감은 난방비 등 관리 에너지가 많이 드는 외국동물 대신 토종 야생동물 보호로 방향을 정했기에 가능했다. 잘 보이진 않지만 늘 우리 주변에 있는 토종 야생동물들은 오랜 시간 국내 기후에 적응했다. 겨울이면 보온성이 좋은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굴에서 지낸다. 그래도 안 되면 몸의 대사를 줄여 동면한다.

인간 활동으로 발생한 탄소 때문에 빙하가 녹아 투발루 같은 섬나라가 물에 잠긴다는 뉴스를 듣지만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여름은 냉방기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 길어지고 사과 재배지가 대구에서 포천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후변화는 더는 남 일이 아니다. 동물원도 습하고 무더운 여름이 지속되자 체온 유지가 힘든 노령동물들에게 에어컨을 켜주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반경 200㎞의 눈밭 사냥터가 일상이므로 내리는 눈은 크게 감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시베리아 호랑이는 반경 200㎞의 눈밭 사냥터가 일상이므로 내리는 눈은 크게 감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청주동물원 김정호 제공

동물원이 토종동물 보호를 넘어 환경을 교육하는 장소가 되면 어떨까? 그동안 성과도 있었다. 해양 포유류 물범을 더 살기 좋은 광주동물원과 제주아쿠아리움으로 보낸 후 수조 관리에 쓰였던 수백t의 수돗물을 절약했다. 수달의 활동은 물범이 살던 곳까지 확장되어 보다 자유롭게 헤엄치고 잔디밭을 뛰어다닌다. 홀로 살았던 아프리카 하이에나와 육지거북은 친구를 만나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동물들을 나은 환경으로 보내려는 의도였지만 열대동물들의 감소로 난방 에너지도 줄었다.

멧돼지 퇴치용 호랑이 똥을 찾는 분들이 있어 밭에 뿌려 시험해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대신 호랑이 똥으로 만든 화분용 퇴비를 나눠주며 자원 순환을 홍보하면 어떨까? 자가용이 아닌 동물원행 시내버스를 타고 와 탄소 발생을 줄인 방문객에게 특별한 안내를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눈 오는 날 꼬리 풍성한 동물원 여우들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아사히야마로 가는 길에 보았던 자작나무숲 여우는 아직 살아 있겠지!

김정호 수의사
야생동물의 구조와 보호를 주목적으로 하는 ‘특별한 동물원’ 청주동물원에서 20년 넘게 수의사로서 일하고 있다. 야생동물 수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수의대 졸업 당시 야생동물을 치료하며 사는 직업이 없어 대안으로 동물원에 입사했다. 동물원이 갈 곳 없는 야생동물들의 보호소이자 자연 복귀를 돕는 야생동물 치료소가 되기를 희망한다. 저서로는 <코끼리 없는 동물원>(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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