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서커스만 생각했어요. 서커스는 내 인생 전부죠, 뭐.”
박세환 동춘서커스 단장에게 서커스의 의미다. 긴 세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애환을 노래한 역전 노장이 담담히 추억을 떠올리며 사연을 풀어놨다. “좋았던 순간도 많지만 지옥 같은 시간이었어요. 20개가 넘던 서커스단 중에 우리만 남았어. 정말 힘들었어요. 서커스만 생각하고 버티고 또 버틴 거야.”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갖 파고를 넘어온 동춘서커스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5월 목포에서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던 동춘 박동수씨가 조선인 30명을 모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이다. 1960~1970년대 황금기에는 총인원이 300여명에 달했다. 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남철·배삼룡·서영춘·이주일, 작곡가 이봉조, 가수 정훈희·하춘화 등 당대 내로라했던 예술인 다수가 동춘을 거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당시에는 서커스가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였어요. 쇼 1시간, 서커스 1시간, 신파극 1시간 구성인데, 이걸 보려 지게에 노모를 지고 먼 길을 걸어온 사람도 있었으니까. 가는 곳마다 긴 줄이 장관이었지.”
‘TV’의 등장은 ‘현장성’으로 승부했던 서커스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1972년 방영된 드라마 <여로>는 치명타였다. 방영 다섯 달 만에 순회 극단과 곡예단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레저·프로스포츠·영화 등의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위기를 부추겼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동춘서커스는 1987년 태풍 셀마에 피해를 입고 파산 상태에 빠졌다.
1963년 스무 살의 나이로 동춘에 입단한 박 단장은 87년 파산 위기에 놓인 동춘서커스를 인수했다. 비주류 문화로 전락한 서커스는 산업화, 민주화, IMF 외환위기, 신종 플루,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굵직한 부침을 겪었다. 여러 번 존폐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현재는 30여명의 단원이 박 단장과 함께하고 있다.
지난 9일 경기 안산시 대부도에 위치한 동춘서커스 공연장을 찾았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천막 극장을 찾은 관객 모두가 곡예사들의 아찔한 몸동작에 숨을 죽인다. 무대와 객석을 가르며 쉴 새 없이 오가는 화려한 조명에 언뜻 비친 곡예사들의 얼굴이 앳되어 보인다. 이들은 현재 동춘서커스의 역사를 함께 쓰고 있는 중국 산시성 창즈시 시립공연단 소속 10대 곡예사들이다. 한국 곡예사의 명맥이 끊기기 시작한 10여년 전 박 단장은 고민 끝에 중국 지자체 공연단 소속 곡예사들을 파견 형태로 채용하기로 했다. 어린 나이지만 적게는 6년 이상 전문 훈련을 받았다. 저글링, 실팽이, 쌍대철봉타기, 애크러배틱 체조, 공중 실크 묘기 등 곡예와 묘기들로 90분 동안 관객을 사로잡는 기계체조와 서커스 전문가들이다.
한국 서커스 100년. 박 단장은 후학 양성을 위한 ‘서커스 아카데미’와 ‘상설 극장’ 설립을 꿈꾸고 있다. 공연장에서 2㎞가량 떨어진 위치에 약 1000평의 부지를 확보해둔 상태다. 박 단장은 “모든 것이 예산 문제가 걸려 있어 목표를 향한 속도가 상당히 더디다”며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세대에 잘 보존된 한국 서커스 문화를 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막이 오르고 곡예사들이 관객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간다. 질곡의 세월을 온몸으로 버텼던 동춘서커스가 다가올 100년을 위해 다시 한번 힘차게 도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