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 1년

환자 희생으로 만든 ‘이상한 뉴노멀’...우리 앞에 던져진 과제는

2025.02.18 18:00 입력 2025.02.18 20:24 수정

18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한 의료인이 잠시 쉬고 있다. 한수빈 기자

18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한 의료인이 잠시 쉬고 있다. 한수빈 기자

2024년 2월 19일 주요 수련병원 전공의들이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반발해 집단 사직한지 1년이 지났다. ‘설마, 이번에는 해결되겠지’ 기대를 모았던 여러 계기가 허사로 돌아가는 동안 전공의 없는 병원은 ‘이상한 뉴 노멀’로 자리잡았다.

17일 기준 전국 211개 수련병원에 출근한 전공의는 1175명으로 의·정 갈등 이전 정원(1만3531명)의 8.7%에 그친다. 교수와 전임의(펠로), 진료지원(PA) 간호사가 빈 자리를 메우고 있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의료 붕괴’ 수준에 이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서서히 의료체계가 마비에 이르는 여러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가 내년도 의대 정원문제부터 대화를 시작하고, 의사 수 증원과 함께 공공성을 높일 수 있는 대책도 뒤따라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환자들의 진료 공백은 커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2∼11월 상급종합병원 47곳에서 건보 청구한 6대 암 수술 건수는 4만8473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5만8248건)보다 16.78% 감소했다. 6대 암은 위암, 간암, 폐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경부암이다. 김동은 계명대 동산병원 교수(이비인후과)는 “외래 진료는 거의 정상화됐지만 문제는 수술”이라며 “원래 마취과 스태프가 부족한데다 전공의마저 없으니 수술을 예전의 3분의 1밖에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료 공백이 발생한 지난해 6개월간 위기가 없었을 때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초과 사망자가 3136명에 달한다는 추산도 나왔다. 김 교수는 “2차 병원에서 중증 환자를 3차 병원(상급종합병원)으로 보내고 싶어도 지금은 보낼 수가 없다보니 2차 병원은 능력에 버거운 환자들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3차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에서 중증 환자를 보기 어렵게 됐다. 야간에 환자를 맡았던 전공의와 펠로(전임의)가 빠져나가면서다. 2차 병원에서 3차 병원으로 전원을 요청해도 받기가 어렵다. 이상윤 건강과대안 책임연구위원은 “의료를 수행하는 노동의 질에 비례해서 의료의 질이 결정된다”며 “밖에서는 (병원이)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탈진한 노동자들이 겨우 버티는 낮은 노동의 질이 초과사망을 부른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 공백을 넘어 의료 재난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김대중 아주대 병원 교수(대한내과학회 수련이사)는 “감기 걸려서 내과 가고, 소아과 가는 정도로는 불편이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중증 환자나 위급한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 위기 상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조합원들이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의료대란 1년, 병원 현장 어떻게 변했나’ 병원노동자 설문조사 결과 공개 기자간담회에서 현장증언을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조합원들이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의료대란 1년, 병원 현장 어떻게 변했나’ 병원노동자 설문조사 결과 공개 기자간담회에서 현장증언을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와 시민건강연구소가 지난해 12월 한달 동안 전공의 수련병원 노동자 829명(의사·관리자 제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32.4%는 전공의 이탈 이후 환자 안전사고가 늘었다고 응답했다. 환자 안전사고 증가 요인으로는 ‘충분한 교육 없이 전공의 업무를 타 직종에게 전가’(59.8%), 구두 처방 증가(34.1%), 담당 교수와 의사소통 어려움 (30.3%)을 꼽았다.

정부와 의료계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반쪽짜리로 출범한 여·야·의·정 협의체는 공전을 거듭하다 20일만에 좌초됐다.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포고령에 담긴 ‘전공의 처단’ 문구는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2월 중 확정해야 할 2026학년도 의대 정원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정부는 ‘증원’을 토대로 ‘규모’를 원점에서 검토한다는 입장인 반면 의료계는 ‘증원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여론은 의대 증원이 우세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공개한 ‘공공의료 현안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1.9%는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지역에서 공공·의료 부족을 경험한 일부 의료진도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증원에 공감하는 의료계 인사들도 정부가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돼 정책 추진 동력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김동은 교수는 “공적인 의사를 지금 키우지 않으면 필수 의료가 힘들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방침에는 동의한다”며 “하지만 지금처럼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의사를 배출 하지 못하는 구조에서 숫자만 늘리는 정책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수도권 피부과·성형외과·안과 등 이른바 돈 되는 과목에 몰리는 현재 구조를 깨지 못하면 증원 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지역의사제, 공공의대, 지역 국립대 강화 등을 의대 증원과 맞물려 추진해야 할 정책으로 꼽았다.

18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한 환자가 보호자와 이동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18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한 환자가 보호자와 이동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조승연 전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은 “학생 선발 과정에서부터 정부가 교육을 지원하고 이들이 공공분야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일본의 공공의대는 일본 전체 의대 중 서열 2위다. 정부가 장학금 지원과 좋은 대우로 이런 롤모델로 운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승준 한양대 의대 교수는 “전공의는 수련생이기 때문에 복지부에서 인력관리를 하고, 트레이닝을 시켜줘야 한다”며 “국가가 인건비를 지원하고 병원이 위탁 교육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대다수가 대학병원에서만 수련을 받아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점도 지적하며 “복지부 관리하에 지역에서도 의무적으로 트레이닝을 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했다.

전공의 복귀를 기다릴 게 아니라 새로운 판을 짜자는 의견도 있다. 김 교수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번을 계기로 상급종합병원은 몸집을 줄이고, 심뇌혈관·암·고위험 산모·희귀질환 소아 환자 등 일반 병·의원이 진료하기 어려운 질환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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