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민주당, 원래 진보 정당 아니다”
조기 대선 앞두고 중도층 겨냥 메시지 해석
김부겸 “정체성 혼자 규정하는 것은 월권”
실제로 중도층 끌어당길 카드일지도 미지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른바 ‘중도보수’ 정당 선언 후폭풍이 거세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가상자산 과세 유예, 상속세 완화 등 중도층을 겨냥한 우클릭 정책 행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당은 진보 정당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자 정체성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일각에선 답보 상태에 빠진 지지율에 이 대표가 성급하게 핸들을 꺾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대표는 1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자주 이야기하는데 민주당은 원래 성장을 중시하는 중도보수”라며 “국민의힘이 극우 보수 또는 거의 범죄 정당이 돼가고 있는데 제자리를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우리는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다”라며 “진보 정당은 정의당과 민주노동당 이런 쪽이 맡고 있는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 대표는 이어 열린 ‘트럼프 시대 : 한미동맹과 조선산업·K-방산의 비전 간담회’에 참석해서도 “최근에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하다 보니까 우클릭 얘기를 자꾸 하던데 우리는 우클릭을 한 바 없다”며 “원래 민주당이 서 있던 자리에서 실사구시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중도보수 정당이라는 주장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이 대표의 중도보수 정당 논쟁은 전날 유튜브 채널 ‘새날’에서 반도체특별법 주 52시간제도 예외 조항 삽입 계획을 철회한 배경을 설명하던 중 “앞으로 대한민국은 민주당이 중도보수 정권, 오른쪽을 맡아야 한다. 우리가 진보 정권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촉발됐다.
이 대표는 이날 오후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서도 이런 입장을 확인하며 “오른쪽이 비었는데 건전한 보수, 합리적 보수도 우리 몫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또 “(민주당이) 정체성을 바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진보적 가치를 버리는 일을 한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지금은 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근로소득세 개편 검토 등 ‘우클릭’ 논란에 대해 “유연하다고 봐주면 좋겠다”며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입장과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더 문제가 아닌가. 교조주의나 바보”라고 말했다.
이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승패를 좌우할 중도층을 겨냥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대표 측 핵심 관계자는 “지금은 선거 국면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선거에선 결국 대중이 있는 곳이 반짝이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 발언에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이 동요할 수는 있지만 중도층을 끌어들여야 승리할 수 있다는 취지다.
이 대표의 단점으로 지적돼온 비호감 이미지를 희석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서울 지역 한 중진 의원은 통화에서 “이 대표를 여전히 거칠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며 “중도와 보수를 아우르는 수권 정당의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 결국 대선은 51%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지도부는 이 대표 엄호에 나섰다. 이언주 최고위원은 이날 회의에서 “국민의힘은 극우를 넘어서 비상식적이고 폭동을 선동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이러니 민주당이 합리적 보수층과 중도 보수층까지 대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진성준 정책위의장도 SBS라디오 인터뷰에서 “민주당의 이념 성향을 구태여 규정하자면 중도보수적인 스탠스가 맞다”고 밝혔다.
비이재명(비명)계는 반발했다. 우선 이 대표가 당의 정체성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진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던 인사들의 노력을 폄훼했다는 지적이 주를 이뤘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주당의 정체성을 혼자 규정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비민주적이고 몰역사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민주당은 강령에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강령은 당의 역사이자 정신”이라고 말했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SNS에 “민주당의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며 “탄핵 이후 민주당이 만들어나갈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는 당 내외의 폭넓은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21대 국회에서 원내대표를 지낸 박광온 전 의원도 “민주당은 자신감을 갖고 길을 잃어선 안 된다”며 “민주당이 중도보수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은 내 집 버리고 남의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실제로 중도보수 선언이 이 대표 기대만큼 중도층을 끌어당기지 못할 것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수도권 재선 의원은 통화에서 “중도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안정성”이라며 “지난 대선에서 기본사회 등 진보 의제를 던졌던 이 대표가 갑자기 중도보수 정당을 주창하고 핸들을 꺾는다고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 대표가 급해 보인다”고 말했다.
비명계 낙선·낙천자 모임 ‘초일회’ 간사인 양기대 전 의원은 SNS에 “민주당과 이 대표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총선에서 진보 개혁을 외치며 표를 얻었는데 갑자기 민주당의 정체성을 중도보수 정당으로 규정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과연 어떤 정치 철학을 가졌는지 의문이 든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이던 2016년 11월 SNS에 “정체성을 잃고 포지션을 중도로 이동하면 오히려 불신을 사고 지지층엔 배신감을, 중도층엔 의심을, 보수층엔 비웃음을 사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대표가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중도보수 정당 논쟁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수도권 한 의원은 통화에서 “지금은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고 정권을 재창출하자는 뜻에서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진 않겠지만, 정권을 되찾은 이후 도대체 민주당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정당이냐를 놓고 세게 부딪힐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