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분노는 ‘정당’ 타인의 분노는 ‘망상’이란 착각

2025.03.14 08:00 입력 2025.03.14 10:16 수정

정신분석학 프리즘으로 분노 해부

권위주의 정치인은 대중 분노 이용해 사익 추구

분노 억압 말고 성찰해야

2023년 3월28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불타는 쓰레기더미 위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뛰어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23년 3월28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불타는 쓰레기더미 위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뛰어넘고 있다. AFP연합뉴스

분노 중독

조시 코언 지음 | 노승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380쪽 | 1만8500원

거리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분노가 들끓고 있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2023년 프랑스에선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경찰과 거세게 충돌했다. 앞서 2016년 영국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치르면서 심각한 분열을 겪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폭력과 증오를 선동하고 있는 미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분노 중독>은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조시 코언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분노라는 감정을 정신분석학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본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실제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분노의 기원과 양상, 분노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살핀다.

저자는 분노를 설명하기 위해 배고픈 아기의 예를 든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림으로써 젖을 얻는다. 이 경험은 아기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이른바 ‘전능한 통제’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성장이란 이 환상이 무참히 깨지는 과정이다. 부모를 포함해 타인은 “아이의 사랑, 쾌감, 권력의 요구를 충족해주는 데 실패하거나 무능하거나 그럴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분노를 느낄 때 우리는 “유아기 초기 상태”로 돌아가, 분노에 포획된다. “분노는 시간의 흐름을 멈춰 우리를 동일한 순간의 밀폐된 방에, 동일한 상처의 쓰라림에 가둔다.”

분노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다. 저자는 분노를 ‘의로운 분노’, ‘실패한 분노’, ‘냉소적 분노’, ‘유용한 분노’로 구분한다.

먼저 의로운 분노는 “자신이 옳다는 철저한 확신에서 분열적이고 편집증적으로 표출되는 분노”를 지칭한다. 자신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과 경험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분노에 사로잡힌다.

저자는 자신의 상담실을 찾았던 빅터라는 인물의 사례를 든다. 빅터는 브렉시트 찬성 진영의 국민투표 승리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당선에 분노하는 인물이다. 저자는 “분노는 가장 옳게 느껴지는 순간에 가장 위험하다”면서 독자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다른 사람의 분노를 광적 망상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분노는 전적으로 일관되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이 과연 이성적일까?”

저자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포퓰리스트, 지하드 테러리스트,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모솔’(연애경험이 없는 남성), 기후 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이 테러와 독재에 반대하고 기후 정의를 추구하는 시민들과 윤리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분노가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의 밑바닥에는 “피해가 응답받지 않았다”는 원한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미투 운동가가 느끼는 불같은 불의를 어그로 끄는 모솔도 똑같이 느낀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파괴적 분노와 긍정적 분노의 차이는 근본적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해당 사안에 대한 주관적 선호보다 탄탄한 기준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주관적 선호는 ‘나의 분노는 좋고 너의 분노는 나쁘다’는 위험한 고집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갖는 또 하나의 위험성은 타인의 조작에 휘둘리기 쉽다는 점이다. 뉴욕의 정신과 의사 아이작 허시코프와 백만장자 마티 마코위츠의 관계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 중 하나다. 허시코프는 1981년 가족 내 경영권 분쟁으로 상처를 입은 마코위츠에게 ‘확실한 보살핌’을 약속한 뒤 30년 동안 마코위츠를 노예처럼 부렸다. 마코위츠의 별장에 손님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고, 심지어는 마코위츠에게 술과 음식을 나르도록 시켰다. 허시코프는 또 마코위츠가 가족들과 절연하게 만들었다. 허시코프는 이처럼 마코위츠의 권리를 제멋대로 침탈하면서도 치료비는 모두 챙겼다.

허시코프는 마코위츠가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깊이 의존하게 만들어 지배자로 군림했다. 권위주의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전략이 이와 동일하다. 권위주의 정치인들은 지지자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약탈하는 이민자나 수상쩍은 정치 엘리트)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고는 그들의 공포를 자극하고 분노를 유발한다. 대중은 “이런 적대적 힘 앞에서 불안정을 느낄수록 자신이 이상화한 지도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폭력성이나 진보파의 음모를 부각시켜온 트럼프나 미국과 유럽의 위협을 들먹이며 종신집권 체제를 완성한 푸틴은 이 같은 대중의 취약한 심리를 활용해 권력을 거머쥐었다.

저자는 “이 총체적 통제와 굴종의 드라마는 지난 10년간 세계 정치에서 벌어진 주요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라고 말한다. “마코위츠가 허시코프를 상담가로 선택하고 자신의 권리와 자율성을 기꺼이 넘겨준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미국, 헝가리, 브라질, 튀르키예, 인도, 필리핀의 유권자들은 자유와 저항권을 억압하고 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일상화하겠다고 공언하는 지도자를 선택했다. 허시코프와 마찬가지로 이 지도자들은 삶에 대하 제약이 실은 확장이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분노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출하는 대신 창조적인 힘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 걸까.

저자는 분노를 억압하는 대신 분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로부터 충분한 정신적 거리를 두어 분노에 의문을 제기하고 분노가 무엇에 대한 것이고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물을 수 있으면 분노는 공격의 산파가 되기보다는 자기반성을 증진하고 공격의 자동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

[책과 삶] 내 분노는 ‘정당’ 타인의 분노는 ‘망상’이란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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