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있되 없는 것처럼…발달장애인들의 공간이기에

2022.06.28 22:08 입력 2022.06.29 13:24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③ 조재원 공일 스튜디오 대표,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 리노베이션

서울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발달장애인 보호작업장과 체육시설을 결합했다. 식사·교육·만남의 공간인 1층 라운지 ‘비버홀’(사진). 진효숙 제공

서울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발달장애인 보호작업장과 체육시설을 결합했다. 식사·교육·만남의 공간인 1층 라운지 ‘비버홀’(사진). 진효숙 제공

너무 넓거나 좁은 공간은 경계 대상
안전한 영역감 위해 책장으로 구분

■ 일터와 삶터를 고려한 보호작업장 새 모델

“아이들 표정이 밝아졌어요.” 서울 강동구의 구립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 석진택 센터장이 필자와 건축가 조재원을 만나자마자 건넨 말이다. 전체면적 957.6㎡(290평), 3층 규모의 크지 않은 발달장애인 보호작업장이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재개관한 지 1년. 공간 사용자가 건축가에게 전한 최고의 평가였다. 이 작업에 발달장애인 고용을 촉진하는 사회적기업 베어베터가 4억원 정도의 공간 리노베이션 자금을 지원했다. 부족한 예산은 위탁 운영자인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기금 모음 캠페인으로 조달했다. 그 자금을 기반으로 공일스튜디오(0_1 Studio) 대표 조재원이 공간 기획과 설계를 총괄했다. 스튜디오비지비비 대표 이현진이 공동 설계자로 참여했다.

새롭게 단장한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는 “직업 재활 시설의 새로운 모델”로 출발했다. 발달장애인이 지역 공동체 안에서 일과 일상의 균형을 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작업장에 체육시설을 결합한 혁신적인 사례다. 발달장애인 사원들에게 일터란 가정 바깥에서 사회적 경험이 이뤄지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그들이 직장에서 질 좋은 노동 경험과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이곳의 공간과 운영을 개편하는 작업이 추진됐다.

낙후됐던 복지센터의 가장 큰 공간 변화는 층별 기능이다. 1층 작업장을 3층에 배치했다. 1층은 라운지 공간으로 바꾸었다. ‘비버홀’로 이름 붙인 라운지에서 사원들은 식사를 하거나 교육 활동을 진행한다. 보호자나 외부인을 마중하는 장소로도 이용한다. 예고 없이 사람들이 드나들어 어수선했던 작업장을 독립된 작업공간으로 만들었다. 타인 시선에 민감한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했다. 자재 반출·입이 예전보다 어려워지긴 했지만 안정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 결과 거리와 연결된 지상부는 지역사회 일원들과 자연스러운 교감이 이뤄지는 전이 공간이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2층에 들어간 체육시설이다. ‘별별체육관’이라고 이름 붙은 이곳은 일터가 곧 삶터인 발달장애인들이 몸과 심리적 건강을 챙기는 복지공간이다. 별별체육관은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발달장애인 생활체육 활성화를 목표로 그간 쌓아온 노하우를 집약한 곳이다. 강동구는 전담 코치를 채용했다. 운영 기반도 마련했다. 확보한 체육시간만큼 근무시간은 줄어들었다. 축소된 사업장 수익을 대체할 사업 대상을 개발하고 조율하는 일이 필요했다. 공간과 운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변화를 이끈 셈이다. 건축가는 사원들의 쾌적한 신체 활동을 위해 2층 전체를 큰 운동 공간과 작은 운동 공간으로 나눴다. 발달장애인에게 너무 넓거나 반대로 너무 좁은 공간은 경계 대상이다. 안전한 영역감을 확보하기 위해 앞뒤가 뚫린 책장 같은 벽체를 사용해 공간을 느슨하게 구분했다. 운동 소도구 등을 넣어 보관하는 격자형 시스템이 완성됐다. 이런 공간 시스템을 1층 비버홀에도 일관되게 적용했다.

건물 전체를 보면, 공간 구성 외에도 사용자 특성을 고려한 세심한 설계가 돋보인다. 먼저 색채 사용이다. 조재원은 코드를 부여하듯 벽, 천장, 바닥 면에 색채를 사용하여 공간정보를 암시하고 적정 크기의 공간들이 연결되는 흐름을 만들었다. 감각에 민감한 발달장애인을 위해 조도와 방음도 신경 썼다. 이들이 공간정보를 쉽고 편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그래픽·캐릭터 디자이너와 함께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전략도 짰다. 이처럼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 리노베이션은 물리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공간 기획과 운영을 포괄한다. 외과적·내과적 접근을 두루 검토한 결과다.

서울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발달장애인 보호작업장과 체육시설을 결합했다. 운동 공간인 2층 별별체육관(사진). 진효숙 제공

서울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발달장애인 보호작업장과 체육시설을 결합했다. 운동 공간인 2층 별별체육관(사진). 진효숙 제공

1층에 있던 사업장 3층으로 올리고
라운지 만들어 지역사회와 ‘교감’
2층엔 체육관 신설, 전담 코치도 채용

■ 민간 협력으로 공적 가치를 이끌다

민관 협력으로 진행한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 리노베이션은 민간의 유연한 추진 방식, 뚜렷한 목표의식과 공공기관의 책무가 공존한다. 조재원은 건축으로 그 둘을 이어주었다. 조재원은 민간이 추구하는 공익성을 잘 해석해 공간으로 드러내는 데 강점이 있다. 그는 주어진 조건을 형태적으로 잘 푸는 것보다 건축주도 몰랐던 공간의 미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공간 유형을 제시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러한 조재원의 작업과 연구 성향은 1990년대 후반 네덜란드 유학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곳엔 민간 주도 프로젝트가 활발했다. 암스테르담은 공공주택 건설부터 도시 재개발까지 건축 행위의 실험적 진원지였다. 그곳 생활은 좋은 자극을 주었다. 귀국 후 조재원은 사무소를 열고 공공·민간 영역에서 가구, 인테리어, 주택, 도시설계 등 다양한 규모의 작업에 참여했다. 이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소셜벤처(Social Venture) 기업과 함께 사회적 가치를 촉진시키는 협력작업이다. 대표적으로 서울 성수동의 ‘카우앤독’(2015)과 대학로의 ‘공공일호’(2017)가 있다. 국내 공유 오피스의 원조로 불리는 카우앤독은 소셜벤처 플랫폼으로 기획한 건물이다. 임팩트 투자사(재무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함께 고려하는 투자회사)이자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회사인 소풍(SOPOONG)의 의뢰로 만든 업무공간 모델이다. 공공일호는 부동산 임팩트 투자회사인 공공그라운드가 매입한 샘터사옥을 리노베이션한 곳이다. 조재원은 건축가 김수근이 1979년 완공한 샘터사옥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힘쓰면서 교육혁신을 추구하는 입주사들의 업무공간을 만들었다.

민간의 협력을 통해 공간의 공적 가치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조재원은 건축의 공공성을 구현하는 또 다른 갈래를 보여준다. 법적으로 공공건축은 관이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건축을 뜻한다. 건축 내용에서 공공성에 중점을 두고 이를 실천하려면 공공기관의 경직된 발주 방식에만 집중하지 않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민간 기업도 한계는 있다. 하지만 민간의 자본 조달 방식과 추진의 합리성을 활용하면 폭넓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크고 무거운 매체인 건축이 오늘날 빠른 사회 변화 속도에 보폭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서울 성수동의 ‘카우앤독’. 진효숙 제공

서울 성수동의 ‘카우앤독’. 진효숙 제공

건축의 사회적 가치란 ‘함께 사는 것’
노인·여성·약자 공간 끊임없이 구상

■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공간을 위하여

조재원에게 건축의 사회적 가치란 함께 사는 일이다. 그는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 리노베이션 작업처럼 노인·여성·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간을 연구한다. 누군가를 배제하기보다 함께 살기 위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각자의 속도에 맞는 공간을 빚으려고 여러 분야 동료들과 고민한다. <마이너리티 디자인>의 저자 사와다 도모히로가 “모든 약점은 이 사회의 가능성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약점은 공간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조재원은 그 능동적 실천을 기록하려고 건축 사진가 진효숙,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저자 이인규와 함께 ‘도시는 열린책’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기획했다.

온라인 아카이빙 북 <도시의 열린책 1호>(green.cityopenbook.org)는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 리노베이션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후원으로 제작했다. 완성된 공간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여러 주체와 논의한 건축 과정들이 책에 잘 담겨 있다. 조재원이 참조한 발달장애인 공간 계획에 대한 국내외 자료와 디자인 전략, 실제 완성된 도면과 사진까지 누구나 볼 수 있게 실었다. 후원자와 운영자, 건축가와 디자이너, 코치와 사원의 관점까지 작은 장소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벽돌을 쌓듯 맞물려 한 채의 집이 됐다. 이러한 자원 공유를 통해 조재원은 자신의 건축 작업이 특수한 개별 사례가 아닌 하나의 유형(prototype)이 되길 바란다. 그는 이 기록 자체가 다른 지자체 복지센터가 참조할 수 있는 비물질적 프로토콜로 남길 원한다. 그의 건축은 마침내 디지털 언어인 ‘0(공)’과 ‘1(일)’ 사이를 뜻하는 그의 설계사무소 이름과 공명한다.

조재원

조재원

조재원은 최근 10년간 몸담았던 서울 이태원 사무실을 마포구 성산동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새로운 일하기 방식을 실험 중이다. 동료 건축가들과 ‘커튼홀’이라는 공동 업무공간을 꾸려왔던 그는 성산동에서 기획·컨설팅 회사 단순컴퍼니와 함께 ‘러너스 그라운드’라는, 일터이면서 삶터가 되는 공간을 만들었다. “자기 속도로 변화를 모색하는 학습자들의 운동장”이라는 모토를 내건 이곳은 일반적인 건축설계 사무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운동과 요리 같은 모임 활동과 다양한 주제의 학습 활동을 멤버십으로 운영한다. 반면 업무는 단출한 회의 테이블에서 효율적으로 이뤄진다. 각자의 장소에서 디지털 도구로 협업할 수 있기에 한곳에서 복잡하게 일할 필요가 없다. 이태원 시절보다 가벼워진 몸으로 그는 사무소의 경계를 누군가에게 열고 있다.

조재원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건축은 토건 사업이 아니라 스타트업인 것만 같다. 그가 말하는 건축은 큰 것들을 빠르게 짓느라 숙고할 틈 없이 밀어붙였던 한국 사회의 건축 생산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선례가 많지 않기에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허상의 이미지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가 말하는 미래 가치의 출발점은 분명한 물리적 공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단위 면적당 공간 가격이 치솟고 대면의 시간이나 자리가 쉽지 않은 오늘날 공간의 잠재 가치를 나누는 방식을 생각해본다. 삶의 거시적·미시적 영역 모두 흔들리는 지금 건축도 다가올 시간에 맞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각자의 속도로, 지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함께 사는 장소를 일구어 나가야 한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벽은 있되 없는 것처럼…발달장애인들의 공간이기에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 <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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