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 국현 디자인기획관 인터뷰
조경가 정영선 전시로
독일 레드닷디자인어워드 ‘최고상’
멀쩡한 벽 뚫고 바닥 올리는 공간 변화
공간이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전시
새롭고 덜 알려진 분야에 재능 있고 헌신적인 사람이 진심을 다해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립현대미술관의 김용주 디자인기획관을 보면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공채 1호 전시 디자이너인 그는 14년간 150여개 전시공간을 디자인하며 미술관 전시 디스플레이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우리나라 전시 디스플레이가 언제 이렇게 발전했느냐”(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는 찬사를 받았다.
내로라하는 국제 디자인어워드에서 받은 상만 14개. 이번에는 조경가 정영선의 전시로 세계적 권위의 독일 레드닷디자인어워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최고상’(Best of the Best)을 수상했다. 50개국 4000점 이상의 출품작 가운데 상위 1%에 주어지는 상으로, 국내 미술관·박물관 전시 디자인 중에 ‘최고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술관에도 디자이너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전시가 끝나면 그 공간은 사라져버리죠. 많은 고민을 하고 디자인하지만 도록에도 남지 않아요. 전시 디자인을 공공성 있게 기록하기 위해 국제 디자인어워드에 출품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업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시작한 일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성과를 남겼다. 2012년 ‘한국의 단색화’ 전시로 레드닷디자인어워드 수상, 2013년 건축가 정기용의 전시로 레드닷디자인어워드·독일 프리미엄 프라이즈 동시 석권, 2014년 조각가 최만린의 전시로 일본 굿디자인어워드 수상 등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한 햇수와 받은 트로피 수가 일치한다. 그럼에도 그는 “좋은 작가를 만나면 당연히 좋은 전시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은 조경가 정영선의 힘이기도 하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태도가 형식이 된다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장에서 만난 김 기획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관람객들도 무릎을 꿇거나 쪼그려 앉아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막혀 있어야 마땅할 미술관 바닥을 전시관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태도가 형식이 된다’는 말을 평소에 즐겨 씁니다. 정영선 선생님은 현장에서 씨앗을 심는 방향, 꽃의 얼굴이 어디를 향할 것인가조차도 직접 살피더라고요. 땅과 가까워지는 행위를 하며 섬세하게 조경의 방향을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영선의 업을 대하는 태도가 관람자들의 관람 행위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정영선의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열리는 조경 전시로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공원, 호암미술관 희원 등 정영선의 반백년 조경작업을 총망라했다. 아우라를 내뿜는 작품도 아닌 건조하고 방대한 자료를 미술관의 화이트큐브 안에 풀어내는 것은 도전적 작업이었다. 그는 “걸림돌이 되는 지점을 잘 분석하면 디딤돌이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단점이 가장 좋은 열쇠가 되어주는 경우가 많다. 아주 넓은 공간이 주어졌다면 바닥에 전시할 아이디어는 못 떠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닥을 전시장으로 만든 이유는 또 있다. “정영선은 반백년을 조경가로서 살아온 사람인데, 그녀의 이야기가 아직 서사화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물 발굴 현장의 바닥이 역사적 현장을 드러내듯 한국의 근현대 조경사와 맥을 같이하는 정영선의 이야기를 관람객이 봐주길 바랐습니다.”
공간으로 전하는 스토리텔링
김 기획관은 공간이 말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가 디자인한 공간 속에서 관람객들은 작가의 삶과 이야기를 경험한다. 지역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평생의 작업을 통해 강조해온 건축가 정기용의 전시를 풀어내기 위해선 멀쩡한 미술관의 벽을 뚫어 하나로 연결된 긴 테이블을 만들었다. “사고가 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고 시설관리팀을 설득했다. 정영선 전시에선 바닥을 뚫는 대신 바닥을 높였다. 지난 전시에 사용했던 각목들을 재활용해 바닥을 높인 후 자료를 전시했다. 지난해 열린 장욱진의 전시에선 60년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가족’ 그림을 학예사가 일본의 한 별장의 벽장 속에서 발견한 순간의 놀라움과 감동을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낮은 천장의 좁은 방에 전시했다.
과감하게 공간을 바꾸는 것도 마다 않는 이유는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선명하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는 “예를 들어 피카소의 전시를 한다면 작품은 같아도 퐁피두센터에서 한 것과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는 다를 수밖에 없죠. 음악에 비유하자면 쇼팽의 악보는 하나지만, 조성진의 연주와 임윤찬의 연주는 감성이 전혀 다른 것과 같아요.”
지난 식목일 개관 이후 현재까지 27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은 정영선의 전시는 오는 22일 막을 내린다. 전시는 끝나도 정영선의 이야기는 남는다. 김 기획관은 “사람들이 전시를 보고 실제 정영선이 조경한 장소를 방문하게 하는 ‘가이드 플랫폼’이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조경은 현장에서 느끼는 감각이 가장 중요한데, 전시관에 조경가를 이야기를 담는게 과연 옳은지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어요. 전시가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게 아니라 정영선이 조경한 곳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면 이 전시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오는 22일 저녁, 김 기획관은 문 닫힌 전시관을 찾아 이제 사라질 공간에 작별 인사를 건넬 것이다. “전시가 철거되기 전, 모두 퇴근한 후 혼자 들어가 그동안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건네요. 전시공간도 하나의 생물체 같아서 처음엔 서로 놓인 관계가 어색하다가 곧 원래 거기 있었던 듯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나거든요. 전시를 하는 시간 동안 공간들이 각자의 몫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 없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 같아 꼭 고맙다는 말을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