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히틀러암살단 상상”

2004.01.08 18:51 입력

=장편 시대소설 ‘볼프’로 데뷔한 이헌씨=

신예작가 이헌씨(28)가 장편소설 ‘볼프’(갈무리)를 내놓았다. 1941년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이현영·윤덕한이라는 조선 유학생이 세 명의 독일 젊은이들과 더불어 히틀러(일명 볼프·독일어로 여우란 뜻)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인이 나치제국의 심장에서 히틀러를 겨냥한다는 발상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전체를 전화로 몰아넣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가 대범하게 펼쳐진다. 더구나 ‘시대소설’(작가 자신의 분류)이지만 조선내 친일파의 입장과, 히틀러를 미워하면서도 그에게 매료당하는 젊은이들의 이중심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이 작품을 쓴 작가는 99년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했다는 것 이외에 뚜렷한 경력이 없다. 소설내용이나 작가이름(나중에 필명임이 밝혀졌으나 본명이 알려지길 거부함)으로 미뤄볼 때 남성이려니 했지만 의외로 가녀린 체구의 여성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머리 속에서 가상의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와 옮겨 적기 시작했다는 이씨는 대학졸업 이후 고시원과 자취방을 돌아다니며 5년째 소설을 쓰고 있다. 서울에 부모님이 계시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 작가가 되겠다는 의지가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왜 신춘문예나 작품공모를 통해 등단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싶었으나 나와는 맞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서너번 단편·장편을 써서 냈다가 떨어졌고, 나중에 당선된 글들을 보면 그런 ‘엄격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전업작가를 열렬히 지망하면서도 유명 소설가들에게 사사받은 적도 없고 그 흔한 문예반 활동조차 한 적이 없다.

“작가가 된 다음에는 어떤 가르침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겠으나 첫 책을 낼 때까지는 독창성을 얻기 위해 송곳으로 얼음을 뚫는다는 심정으로 혼자 작품을 써보고 싶었다”는 게 그 이유다. IMF여파 때문에 취업은 꿈도 꾸기 어려울 때 대학을 졸업한 뒤 구상해놓은 작품만 해도 수십편이다. 이미 완성시킨 건 ‘볼프’ 이외에 장편 SF가 한 권 있고 단편도 한 권 분량쯤 된다.

첫 작품 ‘볼프’는 히틀러에게 매료당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구상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는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유독 히틀러를 기억하는가.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가장 우월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장 확실히 실현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다 일본의 한국점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였음에도 불구, 양자관계로만 파악하는 좁은 시각이 불만스러웠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 현영은 일본의 조선지배가 조선민족의 앞날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확신을 가진 친일파 아버지를 보면서 혼란을 일으키고 독일 유학이후 ‘민족주의의 화신’인 히틀러에게 매료당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통해 유태인이나 조선인이나 그에게는 ‘찌꺼기’일 뿐이라는 자각을 얻는다.

이씨는 백수의 처지로 서울시내 공립도서관을 돌면서 책을 빌려 1년간 자료를 모으고, 2002년 여름 보광동의 보증금 1백만원짜리 지하셋방에서 6개월간 12시간씩 쓰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후 퇴고과정을 거쳐 지난해말 갈무리 출판사의 인터넷 사이트에 투고를 했고, 이를 좋게 본 조정환 대표의 결정으로 전격적으로 출판을 하게 됐다.

“첫 책이 나와서 너무 기쁩니다. 앞으로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작품을 출판하기가 너무 어렵고, 여러 출판사분들에게 들으니 문학책이 너무 안팔린다고 해서 걱정이네요.”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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