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선생 자서전 ‘대화’ 출판 기념회

2005.04.01 17:17

지난 31일 저녁, 리영희 인생회고록 ‘대화’(한길사)의 출간을 축하하는 작은 모임이 열렸다. 외부에 알리지 않은 조촐한 행사였지만 과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지식인·논객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자리였다. 저자 리영희 선생을 비롯해 고은 시인,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역사학자 이이화씨,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 송재소 성균관대 교수, 번역가 김석희씨, 김언호 한길사 사장, 이기웅 열화당 사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리영희선생 자서전 ‘대화’ 출판 기념회

“이번 모임은 ‘대화’의 출간기념회지만 실제로는 28년간 미뤄왔던 ‘우상과 이성’의 출간기념회이기도 합니다. 1977년 책이 나왔을 때 불안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선생과 저녁식사를 했는데 몇 달 만에 선생이 구속돼 출간기념회가 영원히 미뤄졌으니까요.”

김언호 사장이 이렇게 운을 뗐다. 회고록 ‘대화’에는 유신과 군부독재 시절, 지식인 리영희가 겪어야 했던 필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몇 년 전 뇌출혈로 우반신이 마비된 그는 생애 마지막 책 이라는 각오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화를 통해 2년반 만에 이 책을 펴내 주변에 많은 감동을 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빽빽이 교정을 본 원고가 출판사에 특별히 보관돼 있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아쉬움이 많아. 직접 쓴 게 아니라서 나만의 구성·논리·문장을 구사하기 힘들었어요. 꼭 넣으려고 했는데 빠진 부분이 있더구만. 정말 가난했던 60년대 아내(윤영자 여사)가 ‘시장에서 소금·밀가루·설탕을 나란히 놓고 파는데 당장 필요한 소금·밀가루만 보이더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나는 관념과 객관적 실체의 관계를 떠올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고생이 가슴 아파요.”

리선생의 아쉬움에도 불구, 주변에서는 책에 대한 격찬이 쏟아졌다. 고은 시인은 “눈물바람도 하고 통쾌하게 웃기도 하면서 읽어내려간 이 책은 ‘우리시대 진실의 서(書)’”라면서 “해외여행때마다 늘 챙기던 ‘괴테와의 대화’ 대신 우리 형님의 ‘대화’를 꼭 갖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화를 통한 자서전이라는 형식에 유념하면서 “임헌영 선생의 유도심문에 걸려 유도진술하시는 걸 유심히 봤다”며 대담자의 노고를 칭찬했다.

임소장은 “리선생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며 “반미주의자인 선생이 미제 자몽주스를 제일 좋아하신다는 걸 알았다”면서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지만 인간관계와 일상에서는 끊임없이 타협하는 리영희의 인품을 거론했다.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리영희 선생이 “사회과학자의 글은 시대가 바뀌면 허당”이라며 “결국 고향에 남는 것은 작가들의 시와 소설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동양의 전통에서는 문학이 산문에 들어간다”(송재수), “예로부터 문장가는 나라를 좌우했다”(박석무)는 위로(?)가 쏟아졌다.

이 자리에는 이이화 선생의 막내딸 응소씨(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1년)도 참석했다. 그는 리영희 선생에게 “젊은 세대에게 특별히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다. “요즘의 소비자본주의는 사람을 망치는 가장 나쁜 제도”라면서 “자신을 잃고 남에게 끌려가면 안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젊은이들은 선생님 시대처럼 싸워야 할 대상이 없잖아요?”(이응소) “허허, 이념이 앞서는구만. 사회에 꼭 싸워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민주주의의 구심점이 필요해.”(리영희)

화기애애한 저녁모임이 끝나갈 무렵, 김언호 사장은 리영희 전집을 출간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50년 동안 글과 책으로 세상을 바꾸는 계기를 제공했고 그만큼 개인적 고초도 당했어요. 나는 무대 위에서 내려왔고 그저 후배들에게 어깨를 빌려줄 뿐이야. 내 어깨를 밟고 훌쩍 앞으로 뛰어나간다면 그게 행복이지. 이제 앞에 나서지 않으려오.”

앞으로 만나기 힘들어질 그와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 자서전을 집필하는 동안 오히려 건강이 많이 회복된 그는 오는 15일 오후 7시 세종문화회관 컨벤션홀에서 ‘대화’의 독자들을 상대로 대중강연회를 갖는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