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백정의 딸, 전쟁, 이혼··· 서로에게 기대어 빛을 찾아가는 여성 4대의 삶” 첫 장편 <밝은 밤> 펴낸 소설가 최은영

2021.07.29 11:15 입력 2021.07.29 21:51 수정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문단과 독자의 호평을 두루 받은 소설가 최은영이 첫 장편 <밝은 밤>을  펴냈다. <밝은 밤>은 증조모로부터 이어지는 여성 4대에 걸친 이야기다. /박민규 선임기자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문단과 독자의 호평을 두루 받은 소설가 최은영이 첫 장편 <밝은 밤>을 펴냈다. <밝은 밤>은 증조모로부터 이어지는 여성 4대에 걸친 이야기다. /박민규 선임기자

“어둠 속에서도 밝을 수 있잖아요. 인생이 빛으로만 가득차 있다면, 밝다는 것도 알 수 없으니까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보이듯이.”

소설가 최은영(37)의 장편소설 <밝은 밤>의 제목은 그렇게 나왔다. 밤이지만 그럼에도 밝은 시간. 소설 속 인물들이 놓인 상황도 혹독한 밤이다. 백정의 딸로 태어난 여자, 전쟁과 폭력의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은 여자, 이혼했다는 이유로 가족의 부끄러움이 되어야 하는 여자. 이들은 신산한 삶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빛을 찾고, 조금씩 회복해 삶을 이어간다.

<밝은 밤>은 최은영의 첫 장편이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문단과 독자의 호평을 두루 얻은 그가 두 번째 소설집 출간 후 잠시 숨을 고른 뒤 3년 만의 신간으로 돌아왔다. 지난 2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최은영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 그 자체보다 그런 고통을 안고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삶의 모습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 자체가 ‘밝음’이고 용기 있는 일 아닐까”라고 말했다.

소설은 ‘증조할머니-할머니-엄마-나’의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삶을 비추며 100년의 시간을 관통한다. 화자인 서른두살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 직장을 구한 바닷가 작은 도시 ‘희령’으로 떠난다. 이 곳에서 20여년간 연락이 끊겼던 할머니 ‘영옥’과 재회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소원해진 탓에 지연 역시 오랫 동안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고, 할머니는 부쩍 가까워진 손녀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저녁, 할머니가 꺼내온 한 장의 사진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두 여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지연과 놀랄 정도로 닮은 얼굴이다. 황해도 삼천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나 이름 대신 ‘삼천이’라 불린, 지연의 증조모였다. 증조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냐는 지연의 질문에 할머니는 젖은 눈으로 답한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인터뷰]“백정의 딸, 전쟁, 이혼··· 서로에게 기대어 빛을 찾아가는 여성 4대의 삶” 첫 장편 <밝은 밤> 펴낸 소설가 최은영

소설은 열일곱의 ‘삼천’이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고향 삼천을 떠난 1930년대부터 시작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혹독한 역사 속 힘겨웠던 여자들의 삶을 실타래처럼 풀어보인다. “예전에 박경리 선생님 <토지>를 읽었는데, 백정의 딸인 어린 여자애가 잠깐 나와요. 어떤 에피소드의 일부로 잠깐 스쳐지나가는데,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옛날 백정 신분으로 살던 여자애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삼천’이란 인물이 나왔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빛바랜 한 장의 사진, 글자마저도 희미해진 편지를 매개로 할머니 영옥과 지연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소설은 영옥이 들려준 옛 이야기를 지연의 입을 통해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에만 존재했던 사람들은 다시 현재 시점에서 되살아나 생동한다. 최 작가는 “처음엔 할머니가 화자로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지연이란 인물을 그려 나가면서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관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지연이 증조모 ‘삼천’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자기 삶도 조금씩 변화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은영의 소설 속 여자들은 세상의 적의와 폭력, 하루하루의 모멸과 서러움 속에서도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던 밤처럼 어두운 시대에,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 일어서고 빛을 낸다. 이 여자들의 삶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들도 녹아들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전쟁 때, 피난을 갔을 때 이야기를 제가 어릴 때부터 많이 해주셨어요. 그 시절 할머니도 힘들게 사셨는데, 아기 낳고 밥을 못 먹어 죽을 것 같을 때 옆집 아줌마가 매일 죽을 끓여줬다는 얘기를 지금도 하세요. 이젠 두 분 다 할머니가 되셨는데도, 버스를 타고 멀리 만나러 가시기도 해요. 사람들은 그런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런 작은 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구나, 그래서 살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이 너무 잘 풀리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밝은 게 아니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도 밝을 수 있는 일을요.”

소설가 최은영이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들고 경향신문을 찾았다. 3년 만에 펴낸 신작이다. /박민규 선임기자

소설가 최은영이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들고 경향신문을 찾았다. 3년 만에 펴낸 신작이다. /박민규 선임기자

최은영은 ‘작가의 말’에서 “내게는 지난 2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썼다. 그는 두번째 소설집 출간 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고, 그 시간을 지나 <밝은 밤>을 썼다고 한다. 자신에게 아픈 부분을 소설로 쓴다는 그는 이 소설이 “저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했다. “내가 나를 버리고 미워하는 것은 모질고 나쁜 일이라는 것, 그런 얘기를 저 자신에게 하고 싶었어요. 나에게 버려진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고, 이제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납하자고요. 소설 속 삼천이도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온갖 비참한 일을 겪지만 용기있게 자기 인생을 애써 살아가려 하죠. 세상이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에 얽매여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이 소설을 썼어요. 읽는 분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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