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불쉿 잡’에 시달리는 사람들

2021.09.03 10:52 입력 2021.09.03 23:08 수정

불쉿 잡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김병화 옮김 | 민음사 | 512쪽 | 2만2000원

‘불쉿 잡(Bullshit Job)’은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만든 용어로,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자신의 노동에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직업을 말한다.

‘불쉿 잡(Bullshit Job)’은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만든 용어로,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자신의 노동에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직업을 말한다.

맡겨진 업무가 너무나 무의미하고 불필요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무척 괴롭게 하는 직업이 있을까. 2013년에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한 잡지 창간호에 ‘불쉿 잡(Bullshit Jobs)이라는 현상에 관하여’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글을 한 편 보냈다. 비속어인 ‘불쉿(Bullshit)’은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이라는 뜻으로, ‘불쉿 잡(Bullshit job)’은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허튼 직업’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는 이 글에서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직장생활 내내 내심으로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업무를 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상황이 유발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는 매우 깊다”고 지적했다. 또 “오로지 모든 인간을 일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의미도 없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일들이 있다며 이런 직업을 ‘불쉿 잡’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불쉿 잡의 구체적 예로는 인사 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홍보 조사원, 금융 전략가, 기업 법무팀 변호사 등을 언급했다.

해당 분야 종사자들이라면 자칫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이 글은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단숨에 조회수 100만건 이상을 기록했고, 한국어를 포함한 17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레이버에게는 소위 화이트칼라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자기고백적인 사연이 쏟아졌다. 한 회사 법무팀의 세무 소송 담당 변호사는 “탐욕과 생산성에 매달리는 바쁜 꿀벌 증후군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보상도 없는 야심 경쟁에서 앞서가는 타인들의 이익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라고 요구받습니다”라고 털어놨다.

자신이 하는 일을 무가치하게 느끼는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그레이버는 이 현상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둘러싼 수많은 온라인 토론을 관찰하고, 불쉿 잡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경험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담아 <불쉿 잡>을 내놨다. 이 책은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때 ‘우리가 99%’라는 구호를 창시한 그레이버 교수가 별세하기 2년 전인 2018년에 발간한 유작이다.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는 직장인들의 푸념으로 넘쳐날 것 같지만, 읽다보면 일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책에서 불쉿 잡의 의미를 더 깊게 파고들어간다. 불쉿 잡이란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로 정의된다. 불쉿 잡의 유형은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상사나 관리자를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복 입은 하인’, 타인을 공격하는 요소가 있으며 누군가가 채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직업인 ‘깡패’, 문제를 강력 접착 테이프 같은 임시방편으로 때우는 업무만 하는 ‘임시 땜질꾼’, 실제 목표를 이루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서류를 양산하는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이런 불쉿 업무를 만들어 배분하는 중간 관리자 ‘작업반장’ 등이다. 단순히 생산성이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불쉿 잡이 아니다. 그저 ‘직업을 위한 직업’이 되어버려 일하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노동에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허위와 목적없음’이 불쉿 잡의 핵심이다.

자신이 불쉿 잡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영국의 지방의회에서 품질 성능 담당 주임으로 일하는 마크는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유형에 속한다. 마크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의 모두 형식적인 서류 작성하기, 고위급 관리자들에게 상황이 아주 좋은 척하기, 또 의미도 없는 숫자를 ‘짐승에게 먹여(기계에 입력한다는 의미)’ 상황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 등이다. 이런 일 가운데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마크는 지방 정부의 업무를 매달 ‘목표 점수’를 달성하기 위해 하는 형식적 서류 작성으로 비유했다.

중간 관리자를 맡고 있는 벤은 자신이 개입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개입을 하기 때문에 불쉿 잡에 종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열 명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그들 모두 내 감독 없이도 업무를 볼 수 있다. … 짐작하건대 업무를 실제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충분히 직접 분배할 수 있다. … 내가 아무리 진정으로 노력한다 한들 이 일이 내가 받는 봉급에 걸맞은지 의심이 든다”고 말한다.

저자는 불쉿 잡의 전체 숫자가 최근 들어 더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쓸모 있는 일을 하는 직업에서도 쓸모없는 업무(불쉿 업무)의 비중이 더 늘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화이트칼라 사무직만의 문제가 아니라며 행정 업무의 증가에 시달리는 교육자,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서류 작업과 소모적인 회의 참여로 보내며 괴로워하는 간호사를 예로 든다.

불쉿 잡이 증가하는 사회구조적인 원인 중 하나는 금융자본주의의 성장이다. 금융, 보험, 부동산이 속하는 이른바 ‘FIRE’ 부문은 근 100년간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이 부문에서 불쉿 잡이 급증했다. 돌봄 노동자, 청소 및 경비 노동자, 제조업 공장 노동자 등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일자리 대신 회계 직원, IT 전문직, 컨설턴트 직종이 늘어나면서 불쉿 잡도 증가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는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불쉿 잡’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회가 발전하면서 생산성이 증대되고 부의 크기도 커졌지만, 이로 인한 이윤은 상위 1% 부자들인 사장들, 최고위급 전문 경영자 계급, 투자자들의 재산을 불리는 데로 흘러들어간 것도 불쉿 잡을 늘리는 데 기여했다. 실질적인 상품 생산과 유통 및 유지·관리보다는 할당과 분배를 기초로 하는 ‘경영 봉건제도’의 성장은 경영 계층제의 꼭대기에 더 많은 부가 가도록 만들었다. 저자는 프랑스 마르세유 외곽에 있는 엘리펀트 티(tea) 공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의 직원은 회사가 세계 최대 차 생산 회사인 립톤으로 넘어간 후에 몇십년간 이윤이 늘어났다면서 이런 말을 전한다. “그들이 그 돈을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주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하거나, 새 기계를 들여오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데 그 돈을 더 썼는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화이트칼라 직원을 더 많이 고용했다.” 1930년대에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 15시간 근로가 가능할 것이라 예견했으나, 노동시간 단축 대신 무의미한 일자리만 많아진 것이다.

불쉿 잡에 대한 긴 논의를 통해 저자는 일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현대 노동의 패러독스’에 시달리며 일하고 있다. “첫째, 거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에 대한 감각과 자존감은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회복된다. 둘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는 역설이다.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현장인 일터에서 왜 우리는 스스로를 점점 더 평가절하하고 혐오하며 일해야 하는가. 저자는 그저 시간을 때우듯 일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거스른다는 점을 짚는다.

저자는 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보수와 반비례하는 이 세계는 당연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며, 창의적인 보살핌 노동을 우리 문화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정한 해결책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조심스럽게 불쉿 잡을 줄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제시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시간의 가치를 임금의 값으로만 환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불쉿 잡 대신 좀 더 흥미있는 일을 선택할 여지가 생길 것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불쉿 잡을 줄이자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강력한 주장이다”라면서 “이 책의 핵심은 구체적인 정책 처방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고 논의의 장을 여는 데 있다”고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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