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가 역사를, 역사가 기후를 만든다… ‘기후의 힘’

2021.11.05 11:30 입력 2021.11.05 21:17 수정

기후의 힘

박정재 지음|바다출판사|352쪽|1만8000원

<기후의 힘>은 고대 기후 변화를 통해  기후가 인류의 진화 및 이동과 문명 발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는 책이다.  사진은 스위스 빛 예술가 게리 호프슈테터가 기후 변화를 경고하기 위해 제작한 이미지로, 그린란드 서부 북극해의 빙산에 투사한 ‘베니스 홍수’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기후의 힘>은 고대 기후 변화를 통해 기후가 인류의 진화 및 이동과 문명 발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는 책이다. 사진은 스위스 빛 예술가 게리 호프슈테터가 기후 변화를 경고하기 위해 제작한 이미지로, 그린란드 서부 북극해의 빙산에 투사한 ‘베니스 홍수’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20세기 초 지리학계에서는 과거 문명의 성쇠가 대부분 기후에 의해 결정됐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팽배했다. 엘스워드 헌팅턴은 <문명과 기후>(1915)에서 인간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후 조건으로 기온 3.3~18.3℃, 습도 70% 이하 등을 제시하면서,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지역에서 문명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환경결정론적 시각은 제국주의적 시각을 정당화하며, 논리적 비약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힘을 잃었다가 최근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서울대 지리학과의 박정재 교수는 “기후 변화가 고대 사회의 성쇠를 결정했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며 “결과가 과거보다 정확해지고 다양한 종류의 고기후 프록시 자료(과거 기후 변화 기록이 담긴 물질)가 생산되면서 환경결정론적 해석이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기후결정론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재난과 감염병으로 인해 흔들리는 인류의 문명을 목도하고 있다.

박 교수는 <기후의 힘>에서 “환경 변화에 대비해 미래를 모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거를 참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고대 인류는 지금보다 더 혹독한 기후 변화를 겪으며 생존했다. 차갑고 건조한 기후를 피해 대륙을 건너고, 처음 겪는 기온 상승에 대비하기 위해 농경 문화를 도입했다. 책은 지질시대의 마지막 기인 제4기(약 200만년 전부터 현재)의 기후 변화를 시작으로 기후가 인류의 진화 및 이동과 문명 발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핀다. 고기후학자인 저자는 전 세계의 고기후 자료를 활용해 한반도의 환경사를 복원하고, 한반도 인구 유입 시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기후가 한반도 문명에 미친 영향도 분석했다.

현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처음 나타난 후 수차례에 걸쳐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이 이동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9만~11만년 전과 5만~7만년 전 두 차례로 추정된다. 이동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의 이견이 있지만, 이동의 원인을 기후 변화로 보는 시각에는 여러 학자가 동조한다. 습윤해진 기후 덕에 사하라 사막 일부가 식생으로 덮여 이동 통로가 확보되면서 호기심 많은 호모 사피엔스는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계속 동쪽으로 움직였다. 당시 낮아진 해수면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동남아시아, 한·중·일은 육지로 연결돼 있었고 이 지역을 ‘순다랜드’라고 부른다. 순다랜드 북부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 중 일부는 북상해 중국 북부와 만주 등에 정착했다. 1만9000~2만4000년 전 지구의 추위가 절정에 달했던 최종빙기 최성기가 찾아오자, 북중국의 수렵 채집민들이 따뜻한 해안을 찾아 대거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정착 인류가 훗날 한민족의 바탕이 됐다.

고기후학자들은 인류가 수렵·채집 사회를 넘어 농경 사회로 넘어오게 된 계기를 기후 변화로 설명한다. 약 2만4000~2만7000년 전인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서서히 지구 대기의 온도가 증가하다가, 약 1만2800년전쯤 전세계적으로 급격한 한랭화가 발생했다.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로 불리는 이 기간에 북대서양을 중심으로 수십년 간 평균 기온이 2~6도 가량 떨어졌다.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 직전 온난한 기후 속에서 먹을거리 걱정 없이 지내던 수렵·채집민들은 갑자기 혹독한 환경에 내몰렸다. 일부 학자들은 수렵·채집민이 빈곤을 극복하고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농경이라는 혁신을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서는 농경이 시작된 시기를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가 끝나가던 1만1700~1만2000년 전으로 좁혀서 보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다시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빈번한 이상 기상 현상이 발생하면서 불안해하던 수렵·채집민들이 계절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농경을 시작했을 거라는 시각이다.

기후결정론 중에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많은 것은 고대 문명의 흥망과의 관계다. 현재 인류가 살고 있는 지질 시대인 홀로세(약 1만년 전~현재)는 간빙기이나, 급격한 기온 하강은 주기적으로 발생해 생태계에 충격을 안겼다. 약 3900~4200년 전 지구에 갑작스러운 추위와 대가뭄이 닥쳤다. 이상 기후는 3900년 전부터 300년 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왕국, 이집트 고왕국,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중국의 량주 문화와 룽산 문화도 크게 쇠퇴했다. 약 8150년 전에는 흑해와 북해에서 대형 쓰나미들이 몰려왔던 흔적이 있는데, 이는 ‘노아의 방주’와 같이 다양한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홍수 신화의 기본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기후가 역사를, 역사가 기후를 만든다… ‘기후의 힘’

한반도에서는 기후 변화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책에서는 우리나라 선사 시대의 대표적 문명인 송국리 문화를 중심에 놓고 설명한다. 송국리 문화는 청동기 시대 중·후기를 대표하는 문화다. 대략 3000년 전부터 집약적인 수도작(논에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지음)을 기반으로 성장해 충청 이남의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벼농사를 토대로 오랜 기간 번영을 구가할 것만 같았으나 약 2300년 전 갑작스럽게 소멸해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의 대상이었다.

송국리 문화의 쇠퇴 원인은 최근의 고기후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전남 광양 습지의 꽃가루 퇴적물 자료를 분석한 결과 2700~2800년 전 한반도의 기후가 갑자기 나빠지면서 단기 가뭄이 발생했다. 금강 유역에서 살던 농경민들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남하했다. 일부는 바다를 건너 제주도와 일본 규슈 지역으로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송국리 문화인들은 일본에서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재난과도 같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송국리 문화인들은 죽거나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초기 정착 농경민은 이전의 수렵, 채집민과 비교했을 때 기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며 “이미 정착 상태에 들어선 농경민에게 기후 변화는 악몽과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에도 기후 변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홀로세 후기에 기후 변화를 불러온 주요 요인은 태양 흑점 수의 변화와 화산 활동이다. 태양의 흑점 수가 적어지면서 기온이 크게 변한 극소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극소기 중 하나인 ‘몬더 극소기’는 조선 현종 재위기간의 ‘경신 대기근(2년간 지속)’과 숙종 재위기간에 있던 ‘을병 대기근(5년간 지속)’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저자는 “영조와 정조의 기간은 몬더 극소기와 달튼 극소기 사이 흑점이 많았던 시기, 즉 기후가 양호했을 가능성이 큰 시기와 일치한다”며 “후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두 왕의 치세가 온전히 그들의 정치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일까”라는 재밌는 질문을 던진다. 아쉽게도 한반도의 고기후 연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한계가 있다. 저자는 “서양과 비교해 우리뿐 아니라 중국 서부를 제외한 동북아시아 전체의 관련 자료는 부족한 편”이라며 “기후가 양호한 중위도 지역에 오래 전부터 인간이 거주해 고환경 연구에 주로 활용되는 호수 퇴적물이 대부분 교란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인류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흥미로우나, 고환경 연구의 목적은 단순히 흥미를 충족시키는 데 있지는 않다. 저자는 연구의 목적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 변화의 입증과 해결에 있다는 점을 짚는다. 고기후를 연구하면 현재의 이상 기후가 자연의 주기에 따른 것인지, 인간의 인위적 조작으로 인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과거 65만년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가 180~300ppm사이에서 움직였으나, 현재는 400ppm을 상회한다는 사실을 전하며 “현재 농도는 문자 그대로 전례가 없는 기록적인 수치”라고 말한다. 한국의 최근 30년(1987~2017년) 연평균 기온은 20세기 초의 30년(1912~1941년년)과 비교할 때 1.4도나 높아 지구 평균 증가치를 한참 상회한다. 저자는 최근의 기후 지표들을 토대로 산사태나 해일과 같은 기후 재난이 한국에서도 점점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한다.

책에서는 기후 변화와 기근으로 사회가 붕괴될 조짐이 보일 때 잘 대처한 사례로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군주로 꼽히는 청나라 강희제 때를 꼽는다. 강희제는 수리 시설을 개선하고 정비해 홍수를 조절하고 가뭄을 방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기근의 조짐만 보여도 세금을 면제해주곤 했다고 한다. 강희제의 사례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적극적인 대비이다. “효과가 불분명한 선제적 대책 마련에 아까운 자원만 낭비한다는 지적이 항상 뒤따를 것”이지만, “기후의 힘을 억제해야 우리가 산다”는 것이 최종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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