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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에서 주 52시간제를 확대하고 노동시간 단축에 대대적으로 나서면서, 어떤 사람들의 삶은 확실히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2018년 7월, 공공기관 및 공기업과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52시간제가 처음 시행됐다. 1년이 지나자 언론에서는 미담이 쏟아졌다. 더 일하고 싶은데 업무용 PC가 꺼지고 인사팀으로부터 정시에 퇴근하라는 기분 좋은 눈치를 받는다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사연이 담긴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장식했다. 동네 피트니스센터와 요가 학원이 일찍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붐빈다는 기사도 잇따랐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300인 이상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10명 중 8명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답했다.

2020년 3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직원들이 계산 업무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2020년 3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직원들이 계산 업무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런데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형마트 체인을 가진 한 대기업에서 2018년 1월부터 자사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임금 변동 없이 주 40시간에서 주 35시간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하자, 계산원을 중심으로 마트 노동자들이 반대에 나선 것이다. 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보던 대학원생 이소진씨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함바집, 김밥집, 화장품 공장에서 일하며 “퇴근을 하고 싶은데도 퇴근을 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잔업을 하곤 했다. 그 경험에 비춰보면 노동시간 단축은 ‘하루 1시간의 여유’를 선사하는 일이다. 이씨는 석사 논문 주제로 이 현상을 다뤄보고자 대형마트 노조 조합원 몇몇을 만나 인터뷰를 해보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들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씨는 2018년 7월부터 2018년 11월까지 약 4개월간 서울 시내에 있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마트 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은 그의 논문 ‘표준노동시간 단축이 중년 여성의 일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 B대형마트 캐셔를 중심으로’를 보완해 쓴 것이다. 중년 여성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 사회가 그들의 삶과 일,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여준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이소진 지음|갈라파고스|288쪽|1만6000원

저자는 집에서 가까운 B대형마트 두 지점에 주말 스태프 사원으로 일하겠다고 지원했다. 이력서를 낸 지 약 3주 후,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혹시나 고학력자를 꺼려서 채용에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돼 면접에서는 대학원생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학원에 다니며 일을 구한다고 설명했다. 근무 파트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운 좋게도 계산원 파트에 인원이 비면서 저자는 주말에만 근무하는 아르바이트 계산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채용 과정을 겪으며 저자는 마트 계산원이 ‘중년 여성의 일자리’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계산대에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녀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엄마이자 주부였다. 책에서 공개한 ‘고용형태 공시정보(2020년 공시 기준)’에 따르면 총 6만6586명의 대형마트 노동자 중 전체의 약 68%인 4만5182명이 여성이다. 대형마트 3곳의 여성 직원 비율은 60~80%다.

저자는 마트 계산원에 중년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과 가족임금이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설명한다. 남성 노동자가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가족임금을 받는 개념은 1820~1830년대에 미국에서 등장해 최저생계비를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전략에 따라 발전했다. 임금만으로 가족 모두가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하려는 지표로 가족임금 개념이 사용됐지만, 이는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아이들을 퇴출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남성은 생계부양자이고, 여성은 아니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은 동일한 급여나 혜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더해 일터에 장시간 남아 일을 하면서 회사에 헌신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상적 노동자상’으로 인해 여성이 안정적인 일터에서 밀려난다.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그린 영화 <카트>(2014)의 한 장면.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의 저자는 채용 과정을 겪으며 저자는 마트 계산원이 ‘중년 여성의 일자리’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그린 영화 <카트>(2014)의 한 장면.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의 저자는 채용 과정을 겪으며 저자는 마트 계산원이 ‘중년 여성의 일자리’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한 번 밀려난 여성들은 승진과 연공제 임금을 통해 정년을 보장받고 고용안정을 누리는 ‘내부 노동시장’으로 재진입하지 못한다. 계약기간이 짧고 승진체계가 없으며, 최저시급 언저리에 있는 임금을 받는 ‘외부 노동시장’으로 유입된다. 기혼여성의 40.4%가 결혼 전후로 약 2년 이내에 노동시장을 이탈하는데, 이들이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후에 다시 진입하는 일자리 중 하나가 마트 계산원이다.

수많은 ‘주변부 일자리’ 중에서 왜 중년 여성들은 마트 계산원을 택하는가. 저자는 이를 “‘엄마’의 ‘값싼 노동’을 사는 대형마트”라는 말로 설명한다. 대형마트에서는 시간마다 마트를 방문하는 손님의 수가 달라진다. 대형마트는 인건비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도 유동적인 고객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인력을 시간제로 고용한다. 저자는 채용 당시 주말에만 일하기로 고지받았지만 평일에 불시에 출근해야 할 때가 많았고, 하루 전에야 다음날 근무 일정을 고지받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탄력적인 근무 스케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집단이 바로 누군가의 엄마이자, 주부인 중년 여성”이라며 “중년 여성은 인력 부족에서 비롯된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을 조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중년의 여성들은 집에서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하지만, 이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이자 ‘값싼 시간’으로 취급된다. 저자가 인터뷰한 대형마트 노동자 서지향씨에 따르면, 대형마트가 원하는 ‘인재상’은 “생계부양자가 아니라 벌고자 하는 돈이 적고, 마트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며, 유통업계에서 오래 일한 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몰라서 시키는 대로 토 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다.

업무 일정을 짤 때 계산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듯이, 업무 시간을 한 시간 줄이는 결정을 할 때도 계산원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회사는 임금 삭감 없이 ‘생산성 증진’을 통해 노동시간을 한 시간 줄이겠다고 하면서, 실제 계산 업무에 투입되는 시간이 아니라 노동 준비시간으로 분류되는 시간을 단축시킨다. 노동 준비시간은 출근준비시간과 교대시간, 퇴근준비시간이다. 계산원들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정산소로 돈통을 들고 이동하거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데 사용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단축되면서 저자를 포함한 계산원들은 출근시간을 앞당기고, 퇴근시간을 늦출 수밖에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집계되지 않는 추가노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

엄마의 노동을 값싸게 사려는 대형마트, 그들에게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플랫]

마트에서는 추가 인력을 고용하지 않기 위해 계산원들의 근무시간을 더 잘게 쪼개 배치한다. 부족한 휴게시간으로 인해 계산원들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다음 업무에 투입된다. 휴게시간이 겹칠 때마다 동료와 마주치며 형성하던 친밀한 관계는 강한 노동강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활력소였으나, 근무패턴을 예측할 수 없게 되면서 계산원들은 ‘섬’처럼 일하게 된다. 저자는 “대형마트가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공간”이었으나 “(노동시간 변화 이후로) 일터는 더 이상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 삭막한 공간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근무환경 개선은 모든 노동현장에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일을 하는 정규직 사무직 노동자를 떠올리면 노동시간 한 시간 단축은 불필요한 회의 시간을 줄이거나, 컴퓨터를 끄는 것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이다.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회사 퇴근 이후의 시간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하지만 일명 ‘나인투식스(9~6시 근무)’가 아닌 노동현장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임금과 생산성 문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가 명확하다. 24시간 대기 상태로 있다가 사용자가 원할 때만 노동을 하는 초단기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단축된다고 해서, 노동환경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대형마트 노동자들에게는 임금도 중요했지만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며 “노동자들의 시간은 일터 밖에서도 안에서도 회사의 것이었다”고 말한다. 언제 일할지를 결정함으로써 마트는 계산원들의 생활 패턴과 동료와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저자의 말처럼 “임금을 필두로 한 생산성의 관점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바라볼 때, 우리는 노동 현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이혜인 기자 hye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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