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세월이 무색하게 생생한 비명

2021.12.24 20:50 입력 2021.12.24 20:51 수정

[책과 삶]세월이 무색하게 생생한 비명

[책과 삶]세월이 무색하게 생생한 비명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어떤 나무들은
최승자 지음 | 난다 | 각 192쪽·408쪽
각 1만3000원·1만6000원

“김민정씨, 나 최승잔데요, 나 최승자라고요, 내가요, 책을 읽고 있었는데요……. 그때 말한 내 책 두 권 있잖아요, 그거 내주세요.”

2019년 11월27일, 출판사 난다의 대표 김민정 시인은 오래 기다린 전화를 받았다. 모든 시인의 첫사랑, 최승자 시인(69)이었다. 2015년 그의 산문집을 다시 펴내고 싶다는 제안을 건넨 후 4년 만에 돌아온 답이었다. “그거 내주세요.” 한마디와 함께 최승자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어떤 나무들은>이 잇달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각각 1989년, 1995년 출간된 책이니 31년, 25년 만의 복간이다.

1981년 <이 시대의 사랑> 이후 총 8권의 시집을 냈지만, 그가 쓴 산문집은 이 두 권이 전부다. 세월이 흘러도 갓 지른 비명처럼 생생한, 최승자 시의 본령이 일기와 에세이, 논평과 시론의 형식으로 우리를 만난다. 올해로 등단 43년차인 최승자를 여전히 읽는 청년들에게 37세와 43세의 젊은 최승자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의 문을 열어준다. 아득한 동경과 매혹의 대상, 혹은 “영원한 루머”처럼 느껴지던 그의 삶이 친구처럼 정답게 다가온다.

최승자 시인은 ‘시를 왜 쓰냐’는 질문에 “나는 나를 쓸 뿐”이라고 답한다. 시뿐 아니라 산문집 두 권에도 거침없이 ‘최승자’가 적혔다. ⓒ안규림

최승자 시인은 ‘시를 왜 쓰냐’는 질문에 “나는 나를 쓸 뿐”이라고 답한다. 시뿐 아니라 산문집 두 권에도 거침없이 ‘최승자’가 적혔다. ⓒ안규림

모든 시인들의 첫사랑이 돌아왔다
지독한 절망·일상 속 솔직한 속내를 품어낸
그의 산문에선 첨단의 사유가 빛난다
‘끝’ 속에서 비치는 시작의 기미를 품고서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최승자 시 세계를 지탱하는 지독한 절망의 구체를 짐작하게 하는 책이다. 등단 이전 1976년에 쓴 산문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에서 이미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고 썼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는 유명한 문장도 이 책에 담겼다.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25편의 산문을 엮은 기존 책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새로 쓴 산문 6편을 더한 증보판이다.

40여년에 걸쳐 쓰인 산문들의 성격은 다양하다. 성년의 기슭에서 떠났던 여행, ‘맹희’라 불렸던 친구에 대한 추억, ‘더펄개’라는 별명으로 소환하는 유년의 기억 등 소소한 기록부터 “빈자와 부자, 농촌과 도시, 자연과 문명, 이상과 현실” 사이의 파괴적 갈등으로부터 잉태된 1980년대 시에 대한 깊이 있는 논평까지 고루 실렸다.

마음에 남는 것은 “가위눌림”이라 표현된 시대적 억압 구조 속에서 이뤄낸 “시적 저항”에 대해 쓴 대목이다. “1980년대가 당신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란 질문의 답으로 쓰인 이 글은,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와 파괴로 점철된 자신의 시들이 결국 ‘가위눌림’에서 깨어나기 위한 싸움이었음을 밝힌다.

1983년, 어머니를 여읜 뒤 쓴 ‘죽음에 대하여’에선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고백하며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고 썼다. 그는 죽음에 매혹됐으나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절망으로 얼룩진 최승자의 시들은 결국 시대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그를 억누른 지독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희망의 분투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하는 사유들이 곳곳에 출몰한다.

열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어떤 나무들은>은 읽기에 한결 재밌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가 죽음에 가까운 관념적 사유가 중심이 된다면, <어떤 나무들은>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기록이다.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대학에서 주최하는 인터내셔널 라이팅 프로그램(IWP)에 참가해 첫 외국 여행을 떠난 최승자가 1994년 8월26일부터 1995년 1월16일까지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최승자는 그곳에서 약 30개국에서 참가한 약 30명의 외국 작가들과 떠들고, 파티하고, 춤추고, 낭독하며 시간을 보냈다. 평생 2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을 만큼 탁월한 번역자로도 정평이 난 그지만, “스피킹 이전에 히어링이 더 큰 문제”라며 고민하는 솔직한 속내가 고스란히 적혔다. “섹슈얼 해러서(성추행범)”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매사에 조심하는 미국 남자들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그저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당대의 국내 현실을 씁쓸하게 생각했다. 2021년의 독자에게도 어색함이 없는 첨단의 사유들이 빛난다.

번역자로서 고민도 짙게 묻어난다. 그는 자신의 시 ‘내게 새를 가르쳐주시겠어요?’를 번역하며 난항에 빠진다. 구절 그대로 “Would you teach me a bird?”라고 번역하려는 그에게 동료 작가는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지만 말이 안 된다”며 ‘새’ 대신 ‘새가 되는 법’ 등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럼에도 최승자는 “제한되지 않은, 갇혀 있지 않은 어떤 무한한, 자유로운 상태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새’라는 단어를 고집한다. 그 밖에도 ‘눈빛’을 ‘eye light’으로 번역했다가 ‘gaze(시선)’로 바꿀 수밖에 없던 아쉬움, ‘물빛’을 ‘water light’로 번역한 후의 만족감 등 다양한 예시들을 통해 한국어 문학을 번역하는 일의 어려움과 전망 등을 다룬다.

“청춘이 지난 지 하 많은 세월이 흘렀다. 문득 소식이 와서 묻혀 있던 책이 지금 살아나고 있다. 그것을 나는 지금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이번에 새롭게 적은 <어떤 나무들은>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선 “그만 쓰자. 끝”이라 적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조현병을 앓고 있는 그는 지금 경북 포항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책이 출간된 이후 김민정 시인과의 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독자들이 저를 알아요? 예, 저도 보고 싶어요.” ‘끝’이라 적은 두 권의 책에서, 공교롭게도 시작의 기미가 보인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