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범인 목소리로 더 나은 다음 세상을 상상하는 철학소설”···소설가 장강명

2022.08.22 18:40 입력 2022.08.22 21:46 수정

장편소설 ‘재수사’ 펴낸 장강명

20여년 전 신촌, 공허하고 불안한 지금 한국의 풍경이자 기원

미제사건 추적기와 범인 회고록 두 줄기로 흐르는 3100장 장편

장강명의 신작 <재수사>(은행나무)는 작가 표현을 빌리면 ‘야심작’이자 ‘분수령인 작품’이다. 앞으로 시대와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굵직한 소설을 쓸 것이라고 했다. 사진 은행나무 제공

장강명의 신작 <재수사>(은행나무)는 작가 표현을 빌리면 ‘야심작’이자 ‘분수령인 작품’이다. 앞으로 시대와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굵직한 소설을 쓸 것이라고 했다. 사진 은행나무 제공

“‘문학계 강준만’ 같다”라는 말에 장강명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원래 빨리 쓰는 편입니다. 아침 일어나 글 쓰고 점심 먹고 낮잠 자고, 다시 글 쓰고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는 “기자 때보다 한가하다. 아침에 발제만 안 해도”라며 다시 웃었다. 인터뷰는 장강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되는 바람에 지난 19일 전화로 진행했다.

다작을 두고 농담 반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신간 <재수사>(은행나무)는 단독 저서 기준으로 16번째 책이다. 2011년 <표백>(한겨레출판사)을 내고 소설 단행본 10권, 에세이집 3권, 논픽션물 2권을 냈다. 10월 네 번째 에세이집을 출간한다. 내년 상반기 SF 소설집을 출판한다. 여러 신문에 정기 칼럼을 싣고 있다.

글쓰기 외 일정은 최대한 줄이는 듯했다. 작품의 영상화 각색이나 영화, 드라마의 오리지널 각본 작업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고 한다. “단행본 저술이 본령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우리의 소원은 전쟁>(위즈덤하우스) 에 이어 <재수사>도 영상 판권 계약 작업이 진행중이다.

‘전업 작가’라는 걸 고려하면, <재수사>는 늦게 낸 편이라고 했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만 3년가량 걸렸다. 강력범죄수사대 소속 형사 연지혜가 22년 전 발생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미제사건 추적기와 범인 회고록을 큰 줄기로 형사사법 시스템과 처벌, 윤리와 도덕 철학 문제를 짚어간다.

서울 신촌이 배경이다. 연세대 학부생(98학번)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자취생의 죽음’과 ‘연세대 학부제’를 넣으려고 신촌을 배경으로 정했다고 한다. 20대에 8년 정도 신촌에서 자취했다. 장강명이 보기에 신촌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는 곳 같아요. 내세울 만한 문화도, 추구하는 가치도 없는 곳 같더라고요. 품격도 잘 못 느끼겠고요. 대한민국의 지난 20년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피폐하고 공허한 소설 정조와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강명이 20년 전 이 공간에서 찾으려 한 건 지금 “한국 사회의 풍경과 기원”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저의 감각을 단어로 표현하면 ‘공허와 불안’입니다. 좀 어리둥절하긴 한데 다들 선진국이라고 하잖아요. 경제하고 상관없이 다들 ‘삶이 아름답지 않다. 충만하지 않다’고 여겨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답을 주는 사회가 아닌 것 같아요.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나 추락하는 공포를 품고 사는 거죠. 치안이 좋은데도 뭔가 불안해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공허와 불안’을 키워드로 정했습니다.”

이 공허의 기조는 첫 소설 <표백>과도 이어진다. “<표백> 등장인물들도 공허감에 사로잡혔죠. ‘우리 삶의 목적이나 더 나은 세상이 없는 거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느꼈고요. <재수사>의 주인공인 범인은 ‘더 나은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을 그려 보일 수 있다’고 더 나아갑니다.”

<재수사>는 여러 측면에서 <표백>과 이어진다. 신촌이 배경이다. ‘똑똑한 여학생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형식도 유사하다. <재수사>는 범인의 회고록과 사건이 병렬로 진행한다. <표백>도 짝수 장, 홀수 장에 각각 이야기를 풀어간다.

소설은 범인 회고로 문을 연다. 첫 장은 “나는 병든 인간이다…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시작한다. <재수사> 중 사건의 주요 인물들도 ‘연세대 도스토옙스키 독서 모임’ 출신인데, 이 모임 공고문 첫 문장이 같은 인용문이다.

범인 회고록을 따로 넣으려고 3100매 중 1600매가량을 쓰다 엎었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되게 슬펐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범인 목소리를 빌려서 하려고 했어요. 그런 공간이 필요해 처음부터 다시 썼습니다. <표백> 때로 되돌아간 느낌도 약간 드는데,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소설이 등장한다. 피해자 민소림의 집에도, 범인 집에도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깔려 있다. <재수사>의 살해 현장은 <백치> 결말의 그것과 비슷하다. 장강명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다. 2018년 3월 11일 경향신문에 게재한 ‘내 인생의 책’ 1호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다. 그때 “문자 그대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썼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라는 키릴로프의 말을 인용한 뒤 “자살선언문을 발표하고 연쇄 자살을 감행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소설을 써서 작가로 데뷔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21세기 대한민국 버전의 <악령>을 쓴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다 공허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생각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게 핵심 문장이죠. 가치 판단의 기준이 없고,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는 주관적 가치밖에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 봤는데, 이게 지금 현대사회라고 생각하고요. 현대사회 설계 자체가 각각 다 알아서 자기 인생의 목적을 찾으면 된다는 거 같고요. 현대사회가 근본적으로 의미 찾기가 되지 않는 곳이고, 성공해도 공허한 상태가 되는 곳이라고 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쓰고 싶었습니다.” 범인은 회고록에다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도덕의 중심은 사라지고, 인간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봤다”고 썼다.

회고록엔 고대 철학자 플라톤부터 현대 철학자 피터 싱어까지 등장한다. 사르트르, 마르크스 같은 웬만한 철학자들의 사상 핵심이나 단편(斷片)을 녹였다. 임신중단, 유전자 조작, 지구온난화, 암호화폐 같은 현재 진행형 이슈도 반영했다. 고장나 사람을 향해 질주하는 전차를 가정한 윤리학의 질문인 트롤리 딜레마도 큰 비중으로 다뤘다.

범인의 회고록만 떼어놓고 보면, 한편의 철학 소설 같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는 질문에 장강명은 이렇게 답했다.

“더 중량감 있는 작가가 되고 싶은, 작가적 야심이 있었어요(웃음). 도스토옙스키나 조지 오웰, 존 스타인벡처럼 사회, 문명에 관해 작품으로 의견을 얘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한 사회에 대해 핀 같은 거로 콕콕 찌르는 게 아니라 한 장면을 포착하고, 정면으로 깊게 진단하는 걸 쓰려고 했어요. 폭보다는 깊이 있는 걸 쓰고 싶었는데 깊이를 파고 들어가니 폭도 조금 넓어지더라고요.” 장강명은 “범죄 소설이면서 철학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독자들이 철학 소설로 봐주면) 영광일 것”이라고 말했다.

장강명이 소설에서 진지하게 다룬 ‘철학’ 중 하나는 ‘다음 세상’에 관한 것이다. “다음 세상이라는 건 지금 세상의 규칙, 윤리,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지금 세상에 사로잡힌 사람들한테는 충격적이고 무서운 세상일 겁니다. 그런데도 다음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이 다음 세상은 범인의 입을 빌려 상술했다. 범인은 “형사사법 시스템의 아주 밑바닥에 있는, 더 거대한 것을 뒤엎을 담대한 궁리”를 한다. 그 대상은 “현대를 이루는 시스템들의 시스템”이자 “뤼미에르(계몽주의)”다.

“계몽주의는 처음부터 공허라는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 계몽사상에 바탕을 둔 현대문명의 논리적 귀결은 영적 허무주의다. 이것이 쾌락주의와 물신주의의 토양”이라고 여긴 범인은 ‘다음 세상’에 관한 ‘신계몽주의’를 설파한다.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한데 한 개인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수 없다. 신계몽주의는 이 두 명제를 한 차원 위에서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범인의 그림은 소설 속 ‘사실-상상 복합체’로 구체화한다.

소설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은 ‘뤼미에르 빌딩’이다. 이 이름도 계몽주의란 뜻의 뤼미에르(Lumières)에서 따왔다. 장강명은 이렇게 부연했다. “(무시무시한 살인으로) 기존 계몽주의 사회에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심판받겠다고 하는 존재가 그 공간에서 탄생하는 것이죠. 범인은 신을 거의 찾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신이 사악한 신이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도 하게 됩니다.”

장강명은 “제가 동의하는 부분에다 말 안되는 궤변도 범인의 목소리에 녹였다”고 했다.

사건을 추적하는 장들은 촘촘하고 세밀하다. 장강명은 과거 기자로 일했다. “사건 기자 경험을 반영했느냐”는 질문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했다. “막상 쓰려고 보니까 경찰관들이 어떻게 수사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더라고요. (사건 발생 때는) 어디서 시신이 나왔는지, 피해자 사연이 무엇인지 쓰고, 검거하면 흉악범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썼잖아요. 형사한테 물어보면 ‘특수수사 기법으로 잡았다’ 하고 잘 안 알려주고요. 이번에 리얼하게 묘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어떻게 수사하는지 취재를 했어요.”

<재수사>는 3100매의 장편이다. 요즘 한국 문학계에서 이 정도 길이의 장편은 보기 드물다. “600매 정도만 돼도 장편 소설이라고 하고 나오거든요. 트렌드랑 상관없이 제 문학을 하고 싶어요. 쓰다 보니 좀 힘들었는데, 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앞으로 계속 굵직한 소설들을 쓸 것 같습니다.”

책은 예약판매 중인데도 22일 기준 교보문고 소설 분야 22위에 올랐다. 출판사 은행나무는 “상상 속의 소설을 만났다. 이 소설이 바로 그 소설”(정유정), “장강명이 쓰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소설이 그 증거”(박혜진) 같은 추천사를 넣어 선전한다. 독자들의 평가와 판단은 책 출고일인 25일 이후 나올 것이다.

[인터뷰]“범인 목소리로 더 나은 다음 세상을 상상하는 철학소설”···소설가 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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