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다산책방 | 304쪽 |1만7500원
“그대가 이겼다, 오 창백한 갈릴리인이여. 세상은 그대의 숨으로 잿빛이 되었구나/ 우리는 레테(지옥에 흐르는 망각의 강)의 물을 마셨고 죽음을 배불리 먹었다.”
19세기 영국 시인 앨저넌 찰스 스윈번의 시 ‘프로세르피나 찬가’다. 여기서 창백한 갈릴리인은 나사렛 예수다. 위 시는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전장에서 쓰려져 죽어가면서 한 말로 풀이된다. 4세기 로마의 황제였던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정면에서 거스르며, 다신교인 로마 종교의 부활을 꿈꿨던 인물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출간됐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기억과 왜곡의 문제를 탐구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기억의 한계, 역사의 왜곡, 인간과 삶의 다면성에 대해 풀어놓는다.
작품에는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인 ‘닐’이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에 대해 사유한 부분만 80쪽 가까이 실려 있다. 한 편의 연구 노트를 방불케 하는 이 대목에는 스윈번 외에도 몽테뉴, 새뮤얼 존슨,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율리아누스를 연구하고 서술했던 다양한 학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일신이 아닌 다신교를 지향했던 율리아누스 황제, 31년이라는 그의 짧은 생애에 역사가 달아놓은 다양한 해석들에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 건 무엇 때문일까. 작가는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과 ‘율리아누스’의 이야기를 포개놓으며 ‘단일’ ‘진리’ ‘하나’의 신화와 그것이 전복되는 과정의 아이러니를 지식의 향연으로 펼쳐놓는다.
‘닐’이 율리아누스에 대한 방대한 에세이를 쓰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 핀치 때문이다. 책은 20여년 전 두 번의 이혼을 겪고 배우라는 직업에서도 실패를 겪은 닐이,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화와 문명>이라는 야간 강좌를 통해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핀치 교수는 첫 수업에서부터 “거위의 배 속에 사료를 채우듯 머릿속에 이런저런 사실을 주입하는 수업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닐을 사로잡았다. 닐은 “그녀의 존재와 모범 때문에 나의 뇌는 기어를 바꾸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강의 방식은 진지하면서도 도발적이었고 엄격하면서도 자유로웠다. “그녀는 우리가 뻔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아하게 이끌면서 우리를 교정해 주었지만, 깎아내리지는 않았다.” 핀치 교수는 중세에 전해져 내려오던 성 우르술라와 1만1000명 처녀의 순교를 “경찰관을 이용한 자살”에 빗대고, 카르파초의 그림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을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인 동시에 매혹적인 선전물”이라고 평하며 “기독교라는 종교의 성공 비결 한 가지는 늘 최고의 영화제작자를 고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단일(mono-)한 것에 대한 위험성을 언급한다. “‘모노’라는 말로 시작해서 좋을 건 없죠.” 핀치 교수는 다신교의 부활을 좇았던 363년 율리아누스의 죽음이 “역사가 잘못된 길로 접어든 순간”이라고 규정하며, “배교자는 의심의 대변자이고 의심은 활동적인 지성의 표시”라고 말한다.
닐은 강좌가 끝난 후에도 약 20년간 핀치 교수와 교류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핀치 교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닐은 그가 평생 써온 서류와 노트 들을 유품으로 전해 받는다. 닐은 핀치 교수가 그에게 유품을 남긴 이유를 고민하다 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감지”한다. 닐이 수업의 마지막 과제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에세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닐은 핀치 교수가 남긴 숙제를 완성함으로써 그를 기념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유품들에서 율리아누스에 대한 핀치 교수의 메모와 참고문헌을 따라 가며 율리아누스가 다양하게 조명되어 온 역사에 관한 에세이를 쓴다.
에세이를 끝낸 닐은 좀더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기들에게 연락을 한다. 그 과정에서 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영감을 주는 선생이란 위로를 주는 신화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맞딱뜨린다. 닐은 그가 하나의 진리로 추앙했던 엘리자베스 핀치가 사실 진리가 아닌, 그가 내린 하나의 해석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기독교의 대척점에서 엘리자베스 핀치가 추켜세웠던 율리아누스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재해석돼 왔듯이 말이다.
끝까지 책장을 넘긴 후,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왔을 때 새롭게 읽히는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렇다. 줄곧 닐의 시선을 따라 엘리자베스 핀치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독자도 책장을 덮고 나면 누군가를 일관된 하나의 서사로, 특히 신화로 파악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만나는 엘리자베스 핀치는, 닐의 ‘신화적 시선’으로만 만났던 그와는 또 다르다. 책은, 그리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은 그렇게 또 다시 새롭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