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초국적 장르가 된 ‘K팝’…이젠 해외에서 출발, 한국으로 온다

2019.10.04 06:00 입력 2019.10.04 10:08 수정

전 세계가 K팝의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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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엄희삼 기자

‘선 국내 후 국외’ 기존 공식 깬
스트레이 키즈·카드·TXT
각각 미국·브라질·인니서 강세
유튜브 조회 한국 비중 5% 미만
최근엔 영미 팝 트렌드 융복합
선한 메시지와 화려한 비주얼로
넓어진 시장에 빠르게 적응

유튜브에서 K팝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를 무작위로 클릭해 한글 댓글을 찾아보자. 영어와 스페인어로 뒤덮인 댓글창을 뒤지고 있노라면, 백사장에서 바늘이라도 찾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어딘가 역전된 것 같은 느낌은 온라인 밖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방탄소년단을 포함해 블랙핑크, 엑소, 몬스타엑스, 세븐틴 등 인기 K팝 그룹의 국내 팬덤에선 “한국 활동을 늘려달라”는 불만이 매일같이 터져나온다. 국내보다는 해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K팝 그룹이 많아진 까닭이다.

이상해 보이지만 당연한 풍경이다. 팬덤연구소 블립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간 76개 팀의 K팝 아티스트 관련 영상의 유튜브 조회수를 분석한 결과, 전체의 10.1%만이 한국에서 클릭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7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낸 <2018음악산업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음악산업 수출액은 2년 전보다 15.8% 상승한 5억1250만8000달러에 달한다. 한국은 이제 K팝이 확보한 전체 시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수준이다. K팝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의미다.

5일(현지시간) 미국 LA 할리우드 캐피톨 레코즈 타워에서 최초로 데뷔 무대를 공개하는 SM엔터테인먼트의 글로벌 프로젝트 그룹 슈퍼M(SuperM)은 K팝이 맞이한 변화를 함축적으로 시사한다. K팝은 더 이상 해외로 ‘진출’하거나 ‘수출’되지 않는다. 당연하듯 전 세계를 기반으로 한 K팝의 새로운 전기가 막 열리기 시작했다.

■ 한국은 나중, 해외가 먼저?

VAV

VAV

시대의 공기를 바꾼 것은 물론 2010년대 초반부터 활발하게 미국과 유럽 진출을 도모해온 SM엔터테인먼트와 소녀시대·엑소 등 소속 그룹, 그리고 2017년 전후부터 북미를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방탄소년단이다. 하지만 세계를 ‘기본 시장’으로 사고하는 행동양식의 변화를 보여준 것은 이후 등장한 신인 그룹들의 독특한 행보다. 국내에서 채 입지를 다지기도 전에 해외 팬덤을 먼저 형성하는 그룹들이 나타난 것이다.

팬덤연구소 블립의 분석 결과, 보이그룹 스트레이 키즈(Stray Kids·2017년 데뷔)는 관련 유튜브 조회수 중 약 1.48%만이 한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 클릭된 조회수(4290만회)가 한국(557만회)의 7.7배에 달했다. 혼성그룹 카드(KARD·2016년 데뷔)와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2019년 데뷔)는 각각 전체 조회수의 4.3%와 4.7%만 한국에서 발생했다. 두 그룹은 각각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에서 강세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낮은 국내 인지도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비약적인 구독자수 증가를 보여준 두 보이그룹, 에이티즈(ATEEZ·2018년 데뷔)와 VAV(2015년 데뷔) 역시 해외에서의 인기가 국내를 압도하는 사례로 손꼽힌다.

이들 그룹의 공통점은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적인 해외 투어를 펼쳤다는 것이다. 과거 신인 그룹들의 첫 해외 진출지로 꼽혔던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와 같은 인근 국가가 아닌 북미와 중남미, 유럽 등에서 주로 공연을 이어갔다. 이들이 ‘선 국내 후 국외’라는 가요계의 오랜 공식을 깨고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SNS의 발달, 방탄소년단 이후 세계 특히 미국 시장 중심으로 성장한 K팝 팬덤, 오히려 레드오션이 된 국내 시장 등을 꼽는다.

에이티즈

에이티즈

데뷔 후 석 달 만에 북미 5개 도시, 유럽 10개국 투어에 나선 에이티즈의 소속사 KQ엔터테인먼트 관계자 역시 “한국 아이돌 시장은 변화 속도가 느려 신인이 커나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소규모 기획사로서는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그럴 바에야 SM과 빅히트의 성공으로 막 열리기 시작한 북미·유럽 시장에 적자가 나더라도 일단 뛰어들어 성장의 체감을 얻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SNS를 통해 팬들과 주로 소통하다 보니 해외·국내 팬 구분이 없어진 덕도 있다. 딱히 해외로 진출한다기보단 이미 형성된 팬들이 있는 곳에 가서 공연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덧붙였다.

에이티즈의 해외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예상외로 흑자를 봤다. 빈자리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열었던 1000석의 티켓은 순식간에 동이 나 곧장 공연장을 2000석 규모로 바꿀 정도였다. K팝 아티스트에게 이미 포화상태인 한국 시장보다, 막 열리기 시작한 세계 시장이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 시장이 바뀌니 콘텐츠도 달라진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이미 매니지먼트 중심에서 음악 프로덕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VAV의 소속사 Ateam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워너원의 ‘나야나’ 등 수많은 K팝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 라이언 전은 이같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세계를 시장으로 갖게 된 K팝의 주된 경쟁력은 ‘음악’에서 나온다. 본래 미국과 일본 대중음악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발전한 K팝답게 무명·해외 작곡가에게도 개방적인, 유연한 창작 환경을 유지해온 것이 주효했다는 얘기다. 다양한 작곡가들의 협업 속에서 한 곡을 완성해내는 SM의 ‘송캠프’ 방식은 이제 K팝의 전형이 됐다. 라이언 전은 “서구의 음악적 흐름을 받아들이되 마약·섹스와 같은 그늘진 요소를 배제하고 청량하면서도 건강한 메시지를 담은, 여기에 화려한 비주얼까지 더한 K팝 음악이 경쟁력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워낙에 유연했던 K팝이기에 넓어진 시장에 대한 적응도 빠르다.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소위 K팝스러운 전형적인 공식을 버리고 보다 영미팝 트렌드에 근접한 사운드를 추구하면서, 이미지적으로는 글로벌한 세련미를 더 강조하고 있다”고 최근 K팝 콘텐츠에 생겨난 변화를 설명했다. 여기에 ‘공장식 아이돌’ 너머 ‘이야기가 있는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려는 흐름도 함께 이어졌다. 예컨대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끝이 없는 기말고사’ 등 또래들이 공감할 만한 가사들을 미국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팝의 문법으로 풀어냈다. 에이티즈는 영미권에서 주로 소비되는 트렌디한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K팝스러운 ‘선한 메시지’와 ‘칼군무’만은 빼놓지 않았다.

또 하나의 변화는 미주 시장을 의식해 라틴 문화를 겨냥한 음악이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슈퍼주니어가 라틴팝을 시도해 중남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뒤 보이그룹 SF9, 원포유, VAV 등이 K팝에 라틴팝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라이언 전은 “VAV를 사랑해준 남미 팬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일부러 라틴팝을 표방한 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지난달 27일 방탄소년단의 멤버 제이홉은 미국의 라틴 차트를 휩쓸고 있는 멕시코계 미국인 가수 베키 지(Becky G)와 함께 부른 ‘치킨 누들 수프(Chicken Noodle Soup)’로 69개국 아이튠즈 1위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동명의 흑인 음악을 재창조한 비트 위에 한국어·스페인어 가사가 동시에 쏟아지는 묘한 조합은, 유연성을 무기로 무서운 속도로 진화해온 K팝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 레드오션 한국, 돌아올 이유 있을까

물론 아직은 시작 단계다. 특히 팝의 본고장이자 세계 최대 음악시장인 미국의 아성은 아직 견고하다. 음악 웹진 아이돌로지 편집장 미묘는 “미국은 라틴팝을 제외하고선 다른 문화권 음악이 제대로 자리 잡기 힘든 폐쇄적인 시장이다. 현재는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비주류의 ‘성공 서사’가 주는 쾌감이 북미에서의 K팝 인기를 견인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K팝의 물꼬가 터진 것은 맞지만,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시장에서 끌어들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선 K팝이, 어느 날 갑자기 지금 같은 ‘붐’이 사그라들면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걱정도 든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슈퍼M 등의 행보를 보며 K팝이 한국 음악시장을 자연스레 등지게 되는 것 아니냐는 국내 팬덤의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 시장(2017년 기준)은 미국의 17분의 1 규모에 불과하지만, K팝 아티스트로만 따지면 이미 포화상태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선 한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팬덤연구소 블립 자문위원인 김진우 중앙대 겸임교수는 “한국 시장은 그 규모와 관계없이 ‘본토’로서의 상징성이 크다”며 “해외 팬덤에서도 한국 시장의 성공이 곧 K팝 인증마크인 상황인 만큼, K팝 아티스트들의 최종 종착지는 결국 한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VAV, 잠잠한 국내 반응에 ‘월드 투어’ 베팅…미국·중남미서 돌파구 찾아”

작곡가 겸 제작자 라이언 전

히트곡 ‘나야 나’ 작곡가이기도 한 A Team 엔터테인먼트 라이언 전 총괄이사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히트곡 ‘나야 나’ 작곡가이기도 한 A Team 엔터테인먼트 라이언 전 총괄이사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K팝 시점에선 전 세계가 이미 한 지붕 아래 있어요. 부산을 가나 영국을 가나 미국을 가나 다 똑같죠. 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VAV뿐만 아니라 새롭게 선보일 걸그룹 역시 세계로 계속 뻗어나갈 생각입니다.”

라이언 전(40·전세원)의 꿈은 원대했다.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K팝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포부로 가득했던 그는 샤이니의 ‘루시퍼’, 엑소의 ‘러브 미 라잇’, 워너원의 ‘나야나’ 등 주옥같은 명곡들로 이름을 알린 스타 작곡가다. 동시에 5년차 ‘중고 신인’ 보이그룹 VAV(에이노, 에이스, 바론, 로우, 지우, 제이콥, 세인트반)의 3년차 제작자이기도 하다. 히트곡 메이커로 아이돌 제작자로서, K팝 전성기와 함께 10년을 달려온 그를 지난달 24일 서울 청담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2015년 데뷔 때만 해도 VAV는 주목하기 어려운, 그냥 그런 신인들 중 하나였다. 이들의 ‘대격변’이 시작된 건 2016년 라이언 전이 소속사 Ateam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로 발탁되면서부터였다. “입사 6개월 만에 대표이사로 초고속 승진했어요(웃음). VAV를 재정비하는 작업부터 맡았어요. 새 멤버를 직접 선발해 함께 2017년 2월 싱글 <비너스(VENUS)>를 발매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잠잠한 국내 반응. 라이언 전은 돌파구를 바다 너머에서 찾기로 했다.

VAV의 열혈 ‘월드 투어’가 시작됐다. 작년 미국,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23개 도시를 찾았고 올해는 아시아, 유럽, 미국, 인도, 라틴 투어까지 해냈다. 유튜브 조회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남미 중심으로 인기가 높아지더니 여파가 국내로 유입되기 이르렀다. 지난 7월 신곡 ‘기브 미 모어(Give me more)’로 컴백한 지 1주일 만에 음악방송 1위 후보에 오르는 성장을 일궈낸 것이다.

“찾아가는 서비스를 하고 싶었어요. 유튜브 등을 통해 세계 곳곳에 팬들이 생겨나고 있는 걸 알고,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찾아가자 결심했어요. 다행히 이미 K팝 위상이 높아진 때라 반응이 좋았죠. 첫 공연 때 100명 관객이었다면 다음엔 200명이 돼요. 다음은 400, 800, 1600…. 꼭 두 배씩 뛰었죠. 굳이 미주 시장부터 노린 이유는, 주류 시장부터 개척하고 싶었거든요. 욕심이 많은 게 아니에요. 지금 K팝의 성장세를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방탄소년단 등 빛나는 선례도 있지만, 앞서 미국 시장을 겨냥했다가 타격을 입은 K팝 아티스트도 적지 않은데 실패가 두렵지는 않았을까. 그는 “실패들이 모여 만든 ‘데이터’가 있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고 했다. “이전처럼 그저 한국적인 음악이 아니라, 버터에 김치를 얹는 것처럼 서구와 한국 음악이 자연스레 융화된 음악들이 K팝의 원동력이죠.” 그는 정성스러운 음식을 차리듯, 좋은 음악만 계속 내놓는다면 K팝의 성장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준비 중인 걸그룹 역시 세계 시장에 내놓을 준비가 됐다는 라이언 전이지만,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규모와는 상관없이 아주 중요한, 신체로 따지자면 ‘중추신경’이 바로 한국 시장과 팬들이에요.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공동기획:스페이스오디티 팬덤연구소 블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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