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의 저작권 ‘추급권’ 도입될까?

2020.12.26 11:30

미술품이 재판매될 때 작가가 판매수익의 일정 비율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인 추급권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미술계 현장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는 2007년 당시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였던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1965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에 이런 큰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작품을 소장하다 경매에 내놓은 미국인은 1950년대 한국에서 근무하던 당시 물감 등 재료를 제공한 대가로 ‘빨래터’를 받았다고 밝혔을 정도로 박수근의 사정은 넉넉지 못했다. 2010년 ‘황소’가 35억6000만원에 팔린 데 이어 2018년에는 ‘소’가 47억원에 낙찰된 이중섭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었으나 전쟁 이후 가세가 기운 탓에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향년 39세로 눈을 감은 그 역시 생전에는 작품으로 큰돈을 벌지 못했다.

2013년 12월 서울 강남구 K옥션에서 미술품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3년 12월 서울 강남구 K옥션에서 미술품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음악·영상·출판물은 저작권 있어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 ‘우주’(약 131억원)를 그린 김환기까지 포함해 국내 근현대 작품 중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작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미술 경매시장에서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들이 작품목록을 희소성 있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기류도 존재한다. 박수근은 궁핍하던 시절 자신의 작품을 거의 다 팔아버린 탓에 고가에 거래되는 혜택을 본인은 물론 유족들까지도 누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선 작품이 한 번 팔리고 나서도 차후에 다시 높은 평가를 받아 비싸게 팔릴 때 원작자의 권리를 일부 인정해주는 ‘추급권’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품 재판매권이라고도 불리는 추급권은 미술 작품의 가치를 매길 때 발생하는 특수성 때문에 거론되는 사안이다. 음악이나 영상, 출판물 등 쉽게 복제해서 원작과 똑같은 내용을 감상할 수 있는 다른 예술 분야에선 복제품이 팔릴 때마다 저작권을 인정받아 대가가 원작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미술 작품은 원작이 한 번 팔리고 나면 원작자가 더 이상 자신의 작품으로 돈을 벌 방법을 찾기 어렵다. 박수근이나 이중섭, 빈센트 반 고흐처럼 사후에 수만 배까지 판매가가 치솟더라도 원작자나 유족에게는 한푼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미술품이 재판매될 때 작가가 판매수익의 일정 비율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인 추급권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미술계 현장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국내 미술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한국미술협회의 이사장 선거가 진행 중인 시점이어서 추급권 입법화 공약을 내건 후보들이 나오는 등 내부의 관심은 뜨겁다. 그러나 실제 추급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인 국회 입법 과정은 지지부진하다. 그나마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발표한 ‘미술진흥중장기계획’에 2022년까지 추급권을 도입하겠다는 기본 정책방향이 포함되어 있어 이전보다 논의가 진전되긴 했다. 그럼에도 2019년부터 법적 근거를 마련한 뒤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할 것이라는 정부의 방침 중 현재까지 실현된 내용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함께 국내 미술시장 규모 및 현황을 조사한 ‘2019 미술시장실태조사’를 보면 2018년 기준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9.3% 감소한 4482억원 규모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공식 집계는 2년가량 뒤에 발표될 예정이지만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2020년의 미술시장 규모는 더욱 큰 폭으로 축소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2018년 통계에서 작품 거래량은 전년 대비 10.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고가의 작품 거래는 줄었어도 중저가 작품 거래가 활발해지는 추세가 확인됐다. 추급권 도입이 가장 절실한 지명도 낮은 작가들에게 좀 더 개선된 창작 환경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보이는 셈이다.

국내에서는 미술품 추급권이란 용어조차 낯설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미술품 재판매 시 판매금액 중 일정 비율이 원작자에게 돌아가는 제도는 널리 퍼져 있다. 프랑스가 1920년 가장 먼저 이 제도를 도입한 이후 1921년 벨기에, 1941년 이탈리아가 뒤따라 도입하는 등 추급권을 인정하는 흐름이 이어져 현재 세계 82개국에 도입되어 있다. 유럽연합(EU)에서도 1948년 베른협약을 추인한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2001년부터 유럽연합 차원의 지침과 규정을 만들어 2006년에는 회원국 전체가 추급권을 적용하고 있다.

미술시장 투명성 확보에도 효과
제도를 처음 시행한 프랑스에서는 추급권을 작가 사후 70년까지 인정하기로 결정했고, 영국·독일 등 대부분의 나라가 동일하게 70년을 보장하고 있다. 일반적인 저작권법에서 인정하는 기간과도 동일하다. 추급권을 행사해 작품이 재판매될 때 원작자에게 돌아가는 금액을 보면 도입 초기 프랑스에선 거래액의 3%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도 했으나 유럽연합 전체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판매금액에 따라 다른 요율을 적용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5만유로(약 6740만원) 이하 4%에서 50만유로(약 6억7400만원) 초과 시 0.25%까지 작품 금액에 따라 비율이 달라진다. 최대 청구금액에도 제한이 있어 1만2500유로(약 1680만원)를 넘지 못한다.

국내에선 추급권을 도입하면 그 자체의 효과도 크지만 미술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유의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국내 미술시장은 작가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하는 1차 시장, 사설 갤러리나 중개인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지는 2차 시장, 국제적인 거래와 유통이 이루어지는 3차 시장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1·2차 시장은 정보가 불확실하고 거래도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3차 시장에서는 거래 상황을 검증할 수 있지만 인지도 있는 작가들의 작품만 유통될 수밖에 없다. 유 입법조사관은 “미술시장의 투명성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추급권 도입과 관련해서 가장 요구되는 사항인 동시에 추급권 도입의 기대효과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불투명한 국내 미술시장에서 그나마 판매금액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경매시장 거래 통계를 보면 가장 많이 거래되는 작품들의 가격대는 200만원 이하가 48%로 절반에 육박한다. 바꿔 말하면 200만원짜리 그림 한폭을 그려 팔고 난 뒤에는 작가가 유명해지고 높은 평가를 받아서 아무리 가격이 올라도 더 이상 한 푼도 작가에게 돌아가지 않는 셈이다. 게다가 문체부 연구용역으로 작성된 ‘미술품 재판매에 대한 보상청구권 도입 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추급권 도입 시 원작자에게 돌아갈 재판매보상금 총액은 국내 시장을 통틀어도 최대 20억3600만원에 그쳐 판매자나 구매자에게 큰 부담이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정부가 툭하면 추급권을 보여주기식 정책토론의 단골 소재로 삼았을 뿐 창작에 기여한 저작자에게 정당한 수익이 돌아가지 못하는 구조 자체의 개혁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며 “추급권이 시장을 위축시킨다는 미술품 유통업자들의 반대 속에서 추급권 시행이 미뤄지는 사이 작가들과 유족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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