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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2K'스타일에···Z세대가 꽂혔다

2021.08.13 14:17 입력 2021.08.13 23:28 수정

30·40대에게는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것 같았던 ‘Y2K 스타일(year 2000)’이 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배꼽이 드러난 크롭티와 골반에 걸쳐 입는 로라이즈 청바지, 유치한 비즈 액세서리, 흡사 아동복처럼 보이는 키치한 프린트로 멋을 부린 티셔츠 등 추억이 방울방울 터지는 2000년대 패션 아이템이 ‘힙한’ 유행으로 거듭나고 있다. Z세대의 아이콘 올리비아 로드리고, 두아 리파, 벨라 하디드를 비롯해 K팝 스타 블랙핑크 제니, 태연, 화사 등도 Y2K 패션에 흠뻑 빠졌다.

Y2K 패션 열풍은 사라졌던 추억의 의류 브랜드들을 소환하고 있다. 송승헌, 소지섭 등의 스타를 발굴하며 2000년대 초반까지 젊은층에 큰 인기를 끈 브랜드 ‘스톰’이 오는 9월 재론칭을 앞두고 있다.

Y2K 패션 열풍은 사라졌던 추억의 의류 브랜드들을 소환하고 있다. 송승헌, 소지섭 등의 스타를 발굴하며 2000년대 초반까지 젊은층에 큰 인기를 끈 브랜드 ‘스톰’이 오는 9월 재론칭을 앞두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국내 패션계도 발 빠르게 이 분위기에 올라탔다. 3040세대들이 학창 시절 한 번쯤 부모에게 사달라고 졸라본 적이 있는, 2000년대 ‘등골브레이커’ 브랜드들이 새 출발 소식을 속속 전하고 있다. 2019년 재론칭한 ‘챔피온’은 예전 카탈로그 제품을 모티브로 한 빈티지 포토프린트 셔츠가 인기를 끌며 올 7월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0% 넘게 상승했다. 글로벌 데님브랜드 ‘리’는 올해 재론칭 직후부터 쇼핑몰 무신사 판매랭킹 10위권에 진입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모델 공개오디션을 통해 소지섭, 송승헌, 김하늘이라는 걸출한 스타들을 탄생시킨 브랜드 ‘스톰’은 오는 9월에 본격 재출시된다. 1995년 ‘스톰’ 론칭 멤버로 활동했던 김현정 디자이너가 진두지휘에 나서며 Y2K 감성을 제대로 담아 MZ세대를 겨냥하겠다는 포부다. 강남 힙합 패션의 대표주자 ‘노티카’, 전지현 데님으로 유명했던 ‘트루릴리전’, 이름이 어려워 더 그럴싸해 보였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도 컴백 행렬에 가세했다.

레드벨벳 조이, Y2K 콘셉트의 앨범 재킷

레드벨벳 조이, Y2K 콘셉트의 앨범 재킷

레트로(복고)의 주기가 빨라진 걸까. 레트로라고 규정짓기도 애매한 20년 전 스타일이 Z세대에게는 최신 트렌드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레트로란 ‘응답하라 시리즈’ ‘탑골가요’ ‘빈티지 패션’ 등과 같이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향수’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과거를 곱씹고 즐기는 유행을 말한다. 반면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Z세대에게 Y2K 시대의 문화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전문가들은 Z세대가 단순히 과거 스타일을 즐긴다기보다 처음 경험한 개성 있고 독특한 패션을 미적 요소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코로나 시대, ‘다시 보기’ 열풍

Y2K는 한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99년 세기말 불안과 희망의 혼재를 벗어나 뉴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만큼 문화 전반에서도 사이버, 테크노, 디지털 등 ‘미래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분위기가 피어났다. 지금 보면 ‘이불킥’이 나올 만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혁신적인 노래, 영상, 패션 스타일이 쏟아지던 시기다.

안동대 융합콘텐츠학과 김공숙 교수는 Y2K 스타일의 부활에 대해 “Z세대는 자기표현의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 그만큼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이 없는 세대다. 자신의 생각을 활발하게 전달하고 공유했던 2000년대의 가치관이 지금 세대와 소통을 이뤄낸 것”이라며 “Y2K 스타일은 복고를 즐기는 것이 아닌, Z세대 가치관에 부합하면서도 신선하고 매력 있는 문화 상품이 재탄생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고 분석했다.

하이스쿨 패션의 정수를 보여준 1996년도 영화 <클루리스> 알리샤 실버스톤(왼쪽)과 스쿨룩과 미니백으로 Y2K 패션을 선보인 걸그룹 레드벨벳 조이(오른쪽).

하이스쿨 패션의 정수를 보여준 1996년도 영화 <클루리스> 알리샤 실버스톤(왼쪽)과 스쿨룩과 미니백으로 Y2K 패션을 선보인 걸그룹 레드벨벳 조이(오른쪽).

Y2K 패션 유행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콕’ 생활에 들어간 대중은 각종 동영상 서비스로 시선을 옮겼다. 새롭고 다양한 볼거리를 찾던 이들에게 ‘고전 다시 보기’는 필연적이었다. OTT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2000년 전후 제작된 <클루리스> <킹카로 살아남는 법> <가십걸> 등 하이틴 콘텐츠를 꺼내보기 시작했고, 이를 접한 Z세대가 당시 의상이나 액세서리 등에 흥미를 느낀 것이 본격 유행의 동력이 됐다. 뉴욕 맨해튼 상류층 고교생들을 주인공으로 화려한 패션과 볼거리로 시선을 잡아끈 <가십걸> 시리즈는 그 인기에 힘입어 2021년 버전(<가십걸 리부트>)이 제작되기도 했다.

김공숙 교수는 ‘Oldies but Goodies(올디스 벗 구디스)’로 이런 현상을 설명했다. 그는 “복고라고 모두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거칠고 촌스러울지라도 보편적인 감성을 전달하면서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고전은 시대를 넘어 ‘다시 보기’가 가능하다. 2000년대 초반은 하이틴 장르물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외모나 의상에서 벗어나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가 담긴 작품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재조명

2000년을 강타했던 유행 아이템 브리트니 스피어스(왼쪽)의 벨로아 재질 트레이닝복과 이를 재현한 걸그룹 블랙핑크 제니(오른쪽). 제니 인스타그램

2000년을 강타했던 유행 아이템 브리트니 스피어스(왼쪽)의 벨로아 재질 트레이닝복과 이를 재현한 걸그룹 블랙핑크 제니(오른쪽). 제니 인스타그램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1998년 ‘Baby One More Time(베이비 원 모어 타임)’으로 데뷔했다. 그는 2000년대 중반까지 유행을 선도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싱어로 전성기를 보냈다.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철 지난 셀럽’으로 잊힐 줄 알았던 브리트니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활동 당시부터 지금까지 친부로부터 정신적·재정적 속박을 받고 있다고 폭로하고 법정 공방을 펼치고 있다. 이어 온라인상에서는 그의 행동을 응원하는 ‘#Free Britney(프리 브리트니)’ 해시태그 운동이 촉발됐다.

Z세대는 브리트니의 저항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Z세대 팝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최근 ‘GQ’와의 인터뷰에서 “브리트니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는데 정말 끔찍했다. 과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젊은 여성을 이용하고 조종하며 괴롭히는 것에 얼마나 능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아티스트의 정신 건강보다 돈 버는 것을 우선시해왔다는 것이 브리트니를 보면 명백해진다”고 비판했다.

반짝이는 비즈 헤어핀도 Y2K 유행 아이템 중 하나. 2000년도 패리스 힐튼과 2021년 걸그룹 트와이스 채영.

반짝이는 비즈 헤어핀도 Y2K 유행 아이템 중 하나. 2000년도 패리스 힐튼과 2021년 걸그룹 트와이스 채영.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글로벌 호텔 체인 힐튼 가문의 일원이자 할리우드 스타인 패리스 힐튼은 유튜브 오리지널 채널과 <디스 이즈 패리스(This is Paris)>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는 10대 시절 유타주 프로보에 있는 기숙학교 재학 시절 전 남자친구들로부터 학대당했던 사실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패리스 힐튼은 이런 관심에 힘입어 넷플릭스 요리 리얼리티쇼 <Cooking with Paris(쿠킹 위드 패리스)>에 다시 등장했다. 패션, 스타일, 심지어 언행까지 모두 Y2K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라 더욱 놀랍다는 반응이 나온다.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 두 사람의 발언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Z세대의 저항 의식과 주파수가 맞아떨어졌다. 동시에 두 사람의 과거 활동이 재조명되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패션이나 스타일이 트렌드가 됐다.

■Z세대 가치 소비 성향

2000년대 초반 미국 하이틴 드라마 <가십걸>의 주인공 블레이크 라이블리(왼쪽)가 입은 베이비 티셔츠와 비즈 액세서리는 Y2K 시대 대표적인 10대 유행 아이템이었다. 이를 재현해 멋을 낸 가수 태연(오른쪽).

2000년대 초반 미국 하이틴 드라마 <가십걸>의 주인공 블레이크 라이블리(왼쪽)가 입은 베이비 티셔츠와 비즈 액세서리는 Y2K 시대 대표적인 10대 유행 아이템이었다. 이를 재현해 멋을 낸 가수 태연(오른쪽).

Y2K 스타일 붐은 미국 10~20대 사이에서 시작됐다. 뉴욕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빈티지 의상숍 밀집 골목은 10~20대들이 몰리면서 일명 ‘틱톡 블록’으로 거듭났다. 해외판 ‘당근마켓’인 중고거래앱 ‘Depop(디팝)’은 이용자 3000만명을 넘기며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해당 앱이 실시한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이용자 중 90%가 빈티지 의상에 열광하는 26세 이하 Z세대였다. 또한 응답자의 75%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중고로 구입한다”고 답했다.

Y2K 패션은 Z세대의 성향 중 하나인 친환경 윤리를 기반으로 한 가치 소비와도 이어진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트렌드 코리아 2021’에는 ‘N차 신상’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다. ‘N차 신상’은 코로나19시대에 부상한 2021년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물건이 여러 차례 거래되더라도 구매자에게 신상품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는 개념을 뜻한다. ‘트렌드 코리아 2021’은 이와 관련, △물건 구매 시 처분까지 생각하는 친환경 시대의 도래 △쉽고 안전해진 중고마켓 플랫폼의 활성화 △상품의 소유가 아니라 경험을 중시하는 문화의 확산 △코로나19로 인한 ‘짠테크’와 ‘집콕 소비’ 증가로 중고 소비가 유행처럼 이어질 것이라 설명한다.

또한 Z세대는 1990년대 경제 호황기 속에서 자라난 동시에 부모 세대인 X세대가 1998년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안정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들은 ‘신상’도 구매하는 순간 중고가 되어버린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 신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고 물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불과 20년 전 유행인 Y2K 패션은 Z세대가 중고 소비를 통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빈티지 패션 스타일이 됐다. 합리적 소비 형태와 독특한 표현으로 개성을 추구하는 Z세대 성향은 Y2K 패션을 ‘역주행’시킨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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