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가대표’ 성차별 짚은 이은규 PD, 여성 다큐 계속 만드는 이유

2021.08.17 20:19 입력 2021.08.17 23:09 수정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김연경 선수는 여성 배구 선수들의 낮은 샐러리캡과 부당한 대우에 계속 문제제기를 해왔다. KBS 캡처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김연경 선수는 여성 배구 선수들의 낮은 샐러리캡과 부당한 대우에 계속 문제제기를 해왔다. KBS 캡처

“혹시 경기를 웃으면서 할 수는 없나요?” 오래된 TV 화면 속, 질문을 받은 박세리 선수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스친다. KBS 데이터베이스에 잠자고 있던 이 장면을 현재로 길어올린 것은 지난 12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 카메라는 20여년이 흘러 이제는 감독이 된 박세리의 진지한 얼굴을 비춘다. “남자와 여자를 나누기 전에 갖고 있는 능력을 봐야죠.”

여성 스포츠 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웃음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이 당연한 진실을 말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가대표>는 해묵은 성차별 속에서 부단히 변화를 만들어 온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오랜 투쟁기에 주목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낮은 상금과 연봉, 갖은 외모 품평과 트집을 감당하며 지도자의 기회조차 좀처럼 부여받지 못했던 선수들의 시간을 옛 방송 화면과 현재의 인터뷰를 엮어 정연하게 드러낸다. 박세리, 김연경, 지소연, 남현희, 김온아, 정유인 등 전·현 여성 국가대표 선수들의 목소리가 중심에 섰다. 방송 이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1200여개에 달하는 찬사가 쏟아졌다. 오래 기다린 ‘당연한 진실’에 대한 반가움이다.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KBS 캡처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KBS 캡처

“뜨거운 반응에 놀랐어요. 선수들이 이미 인터뷰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알린 내용들인데, 그럼에도 스포츠계 성차별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도리어 깨닫는 계기가 됐죠.”

<국가대표>를 만든 이은규 PD(34)가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6월 <다큐멘터리 개그우먼>, 지난 4월 <다큐멘터리 윤여정>에 이어 그가 선보인 아카이브×인터뷰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지난 16일 전화로 만난 이 PD는 “<개그우먼> 이후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성취가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그 속에서 놓쳤던 부분들은 아카이브로 보는 시리즈를 계속해나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녀 선수의 비율이 1:1에 근접해 ‘성평등 올림픽’으로 주목 받았던 2020 도쿄 올림픽은 <국가대표>에 뜻밖의 설득력을 더했다. 올림픽 동안 선수 개인에 대한 여성혐오 공격, 성차별적 중계 방송이 잇따르면서 여성 선수가 겪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개막식 즈음에 1차 시사를 마친 후, 여성 선수에 대한 외모 품평을 지적하는 부분이 너무 식상하지 않냐는 얘기도 나왔어요. 하지만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그렇기에 계속해서 얘기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지소연 선수는 잉글랜드 여자리그 첼시FC 위민의 열악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7년간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왔다.  KBS 캡처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지소연 선수는 잉글랜드 여자리그 첼시FC 위민의 열악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7년간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왔다. KBS 캡처

과거 방송을 탐색하는 아카이브 작업 속에서도, 성차별은 같은 모습으로 반복됐다. 이 PD는 “미디어가 그려온 여성 선수들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한결 같았다”고 했다. “과거 운동하는 여성을 다룬 다큐들을 보면, 꼭 여성 선수들이 수를 놓거나 뜨개질하는 모습이 나와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는 호돌이 모양 수를 놓기도 하고요(웃음). 김연경 선수도 흥국생명 시절 숙소에서 뜨개질하는 영상이 있더라고요.”

온라인 공간의 익명의 누리꾼들이 데이터베이스 속 곳곳에 숨겨진 차별상을 찾는 동료가 돼주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당시 트위터 이용자들이 합세해 만든 ‘올림픽 중계 성차별 발언 아카이빙’은 망망대해 같은 과거 방송 속에서 “기량이 상승한 것은 남편과의 사랑의 힘인가요” “여성 선수가 쇠로 된 장비를 다루는 걸 보니 인상적이네요” 같은 ‘황당 발언’을 찾도록 돕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이 PD는 “이전부터 (스포츠계의 성차별) 문제를 지적하며 담론을 형성해온 분들 덕분에 <국가대표>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도돌이표 같은 차별을 뚫고 나온 것은 선수들의 목소리와 실력이다. 김연경 선수는 여성 배구 선수들의 낮은 샐러리캡과 부당한 대우에 계속 문제제기를 해왔다. 지소연 선수는 잉글랜드 여자리그 첼시FC 위민의 열악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7년간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왔다. 이 PD는 “섭외는 인터뷰 등을 통해 알려진 과거 발언을 참고해 진행했는데, 영국에서의 활약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 선수의 경우는 좀 달랐다”면서 “축구 종주국에서 여자축구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나쁜 줄 몰랐고, 지 선수의 노력으로 변화가 생겼다는 점도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출연진 모두 기획 의도에 십분 공감해 인터뷰에 참여했지만, 막상 페미니즘 관점을 담은 질문이 잇따르자 ‘이렇게 말해도 되나?’ 우려하기도 했다. 목소리를 내어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에 대한 반발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방송 이후 나올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마땅히 공유해야 할 가치를 담은, 공영방송에 걸맞은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어요.”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는 여성을 주변화하는 스포츠계의 성차별적 관행을 비판하며 동일한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에 임하는 여성과 남성 국가대표의 동등한 위치를 강조한다. KBS 캡처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는 여성을 주변화하는 스포츠계의 성차별적 관행을 비판하며 동일한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에 임하는 여성과 남성 국가대표의 동등한 위치를 강조한다. KBS 캡처

공격과 반발이 예상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 PD는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 제작을 멈출 생각이 없다. “공영방송은 온 국민의 수신료로 만들어지는데, 전체 방송을 봤을 때 과연 2030세대 여성들을 위한 이야기가 얼마나 있을까 싶었어요. <다큐 인사이트>가 1년에 52편 정도 만들어진다면, 그중 적어도 3~4편은 2030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이 됐으면 좋겠다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2030 여성 스태프들과 일하고자 했다. 이 PD는 “방송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는 이들과 함께할 때 더 깊이 있는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며 “조명, 편집, 촬영 쪽은 직업군 성비 때문에 여성 창작자와의 작업이 어려울 때가 많은데 ‘막내급’ 이은비 촬영감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셀러브리티’보다는 ‘직업인’으로서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선수들의 개성을 드러낸 <국가대표> 연출은 이 촬영감독의 솜씨”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박세리 감독은 “남자와 여자를 나누기 전에 갖고 있는 능력을 봐야한다”고 말했다. KBS 캡처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박세리 감독은 “남자와 여자를 나누기 전에 갖고 있는 능력을 봐야한다”고 말했다. KBS 캡처

2014년 입사해 <추적 60분> 등 굵직한 프로그램을 거쳐온 이 PD는 방송가 내부의 변화도 체감한다. “2016년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와 함께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또래 여성 PD들이 각자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상황이에요. 분투가 계속되니 대부분 중년 남성들로 채워진 데스크의 인식도 함께 변화하고 있고요.” 이 PD는 올해 안에 아카이브×인터뷰 시리즈 마지막 편을 완성할 계획이다. “거대 담론들보다는 현실에서 곱씹어 볼 만한 선택의 순간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고 싶다”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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