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능력만 있으면 혐오·차별 정당화…그게 한국 사회”

2021.10.04 14:52 입력 2021.10.04 15:12 수정

‘88만원 세대’ 공저자…‘한국의 능력주의’ 출간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인
과거제도·고시제도 등 거치며 변모·강화돼

<한국의 능력주의> 저자인 박권일 사회비평가·작가가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한국의 능력주의> 저자인 박권일 사회비평가·작가가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돈도 실력이야”(최서원씨 딸 정유라), “일 열심히 하고, 인정받고, 몸 상해서 돈 많이 번 것은 사실”(곽상도 의원 아들).

소위 사회 특권계층 자제들이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지 못한 발언들을 내놓을 때마다 한국 사회가 들끓는다. 한국 사회는 시험과 같은 정당한 경쟁과정을 치르지 않았거나 보상받을 만한 능력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88만원 세대> 공저자로 잘 알려진 박권일 사회비평가·작가는 최근 출간한 <한국의 능력주의>(이데아)에서 이러한 현상을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 한국인”이라며 “그 심성의 기저에 도사린 것이 바로 능력주의”라고 말한다. 비단 특권계층뿐만 아니라 시험이라는 선발절차를 거치지 않은 이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데에도 분노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는 공정한 절차에 따른 능력 측정을 매우 중시한다. 하지만 박 작가는 “능력주의는 기회와 과정의 근본적 불평등, 즉 ‘실질적 불공정’을 은폐하고 형식적 공정성에만 집중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그는 한국 능력주의의 기원을 추적하고, 특징과 의미를 설명하고, ‘이상적 능력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박 작가를 만나 책 이야기를 들었다.

박 작가가 능력주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은 2000년대 중반이다. 당시 박 작가는 한국의 넷우익(국수주의 성향의 우익 누리꾼)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인터넷상의 ‘다문화 반대 커뮤니티’ 같은 곳에 상주했다. ‘일베’까지 이어진 넷우익들의 커뮤니티에서 그는 공통된 정서를 발견했다. 박 작가는 “이용자들이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고, 욕하는 정서를 살펴보면 그들 입장에서 일관되고 정당한 논리가 있었는데 그게 ‘능력주의’였다”며 “최소한의 도덕적·사회적 누름돌을 들어내고 혐오와 차별을 하는 죄의식을 없애주는 강력한 기제였다”고 설명했다. 2018년 석사논문을 쓰면서 한국 능력주의의 기원을 추적했고,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덧붙여 책으로 새로 썼다.

한국 능력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과거제도, 사회진화론, 입신출세주의, 고시제도, 학력주의 등을 거치며 변모하고 강화됐다. 박 작가는 논문은 물론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 보고서’(2018) 같은 공정성 인식조사, 1956년부터 발행된 고시 전문지 ‘고시계’ 등 자료를 샅샅이 살폈다. 그는 “능력주의적 혐오는 ‘괴물이 된 20대’라는 말처럼 청년세대만의 유별난 특성으로 회자되곤 했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제가 본 자료들 중 상당수의 불평등, 공정성 관련 인식 조사에서 세대별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는 청년세대와 마찬가지로 능력주의를 정의”로 여기며, “공정과 능력에 대한 집착은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 한국인에게 내면화된 습속”이라는 진단이다.

박권일 “능력만 있으면 혐오·차별 정당화…그게 한국 사회”

책에서는 능력주의를 ‘현실적 능력주의’와 ‘이상적 능력주의’로 구분해 설명한다. 현실적 능력주의는 부모의 지위나 부의 수준, 학벌 특혜 등 일종의 ‘위장된 신분제’가 작동하는 능력주의다. “(부모의) 돈도 실력이야”라는 발언을 통해 잘 드러나는 사고다. 이상적 능력주의는 세습 신분제적 요소가 제거돼 ‘온전한 능력’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 능력주의다. 박 작가는 “능력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도 현실적 능력주의를 벗어나서 이상적 능력주의로 가면 된다는 논리로 빠지곤 한다”며 “세습 신분제든 현실적 능력주의든 이상적 능력주의든 불평등 자체를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시험이라는 선발 과정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설계된 승자독식 피라미드”인데, 이 같은 문제를 이상적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덮어버린다는 지적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존 롤스의 정의 이론, 코헨의 평등론 등 사회철학이론을 토대로 ‘이상적 능력주의’란 그럴듯해 보여도 현실에 결코 적용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우리의 노력과 능력을 전부 계량화하고 수치화해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습니다. 설령 시험을 통해 측정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산출된 능력이 우리 사회와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려워요. 백번 양보해서 앞의 두 가지를 다 계량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금처럼 최고경영자(CEO)가 일반 노동자 월급의 몇 천배를 받거나, 대리가 몇 년 일하고 50억원을 가져가는 특권이 정당화될 수가 있나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논란의 종착점은 ‘공정한 절차’와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능력주의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박 작가는 능력주의를 ‘마음의 화석연료’에 비유했다. 그는 “한때 이것이 우리의 생산성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가 열심히 살도록 만드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능력주의가 작동하면 할수록 사회적인 부담과 비용만 더 커진다”며 “미래세대라고 할 수 있는 10~30대 자살률도 엄청나게 높고 사회가 생물학적 멸절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책에서는 현장 역량보다 학업 성적 위주인 각종 공채 시험 제도, 승자독식의 정치 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극단적으로 분절된 고용체계를 들며 “능력주의의 지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더 나은 민주사회로 도약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박 작가는 “능력주의에 대한 환상을 한 번에 걷어내기 어렵다면, 눈에 보이는 ‘누가 봐도 특권’이라고 하는 것들부터 줄여나가자”고 제안했다. “음식물쓰레기를 산더미처럼 쌓고 파리가 꼬인다고 투덜대도 소용없듯이,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특권들을 두고 절차만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하자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대안은 곧 불평등의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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