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지로’에 자리잡은 지적‘덕질’의 공간,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2021.12.22 15:04 입력 2021.12.22 23:09 수정

서울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에 있는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에 있는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 역에 내려서 청계천을 따라 걷다보면 세운청계상가가 나온다. 오래된 조명가게와 철물점, 레트로 느낌이 물씬 나는 ‘힙’한 카페들을 지나다 보면 간판 없는 작은 서점이 나온다. 무심한 눈으로 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 찍어 올리기 좋은 예쁜 공간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 자세히 보면 간판이 있을 자리에 한국어를 비롯한 8개 언어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쓰여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도 기웃거리게 만드는 곳, 지난 7월 문을 연 국내 최초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다.

지난 17일 소요서가를 찾았다. 8평짜리 작은 공간에는 3000여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있다. 서점 가운데에는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처음 서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보통 테이블을 따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서가를 훑는다. ‘민음 바칼로레아 과학 편’(60권) 등 알록달록한 입문자용 문고본부터,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철학 원전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한나 아렌트, 소크라테스, 헤겔 등 많이 들어보던 사상가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세 번째 바퀴를 돌면 개인의 취향에 따라 관심가는 책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최근 연달아 세 권의 번역서가 나오면서 화제가 된 프랑스의 여성 사상가 시몬 베유의 책이 페미니즘 코너에 꽂혀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제2의 성>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멈춰 선 여성해방> 등 관련 분야의 책들이 함께 비치돼있어 베유의 책이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어디쯤 위치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서가는 서양철학, 동양철학, 정치철학, 종교철학, 과학철학, 미학, 페미니즘 등의 코너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운영진은 “책의 배치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모이고 교차되며 사상의 층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특히 철학 원전이 시대 흐름대로 꽂힌 서양철학 서가에는 소요서가의 정수가 담겨있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장 하나에 고대철학부터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주요한 책들이 시대순으로 꽂혀있다. 절판돼 살 수 없는 책까지 헌책방에서 구해다가 열람용으로 꽂아놓았기에 큐레이션(책과 서가의 배치)을 보는 것만으로 철학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책장에 적혀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칸트, 푸코 등의 이름을 따라가며 주요 도서들을 살폈다.

소요서가에 처음 방문하면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을 따라서 천천히 돌면서 책을 살피게 된다. 처음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들어오고, 두 번째 바퀴부터는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우철훈 선임기자

소요서가에 처음 방문하면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을 따라서 천천히 돌면서 책을 살피게 된다. 처음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들어오고, 두 번째 바퀴부터는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우철훈 선임기자

운영진은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가 정리를 매일 한다”며 “책을 정리하다보면 저희도 여러 사상가들의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끌어당기고 모인다는 생각을 하게 돼 즐겁다”고 했다. 공들인 큐레이션은 하나의 창작물이며 이 공간에 직접 와야만 체험할 수 있는 가치를 담고있다. 그래서 큐레이션을 기록할 목적으로 너무 자세히 사진을 찍는 것은 서점에서 금지돼있다.

‘철학’이라는 묵직한 주제에 천착하는 전문서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소요서가의 시작은 순수한 ‘지적 덕질’에서 비롯됐다. 서점의 핵심 운영진은 6명이다. 철학 전공자도 있지만 회계사, 목수, 미술교육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날 운영진 중 일부에게 소요서가가 담고 있는 가치관과 탄생과정을 들었다. “특정인에게 소요서가의 성과가 귀속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뜻을 존중해 운영진 이름은 기사에 넣지 않았다.

소요서가를 만든 이들은 한 다리 건너 알음알음 알던 사이인데, 철학이 좋아 함께 책을 읽고 을지로의 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공부모임을 가졌다. 모임을 거듭할수록 “읽고 싶은데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눈에 띄었고, 우리가 보고 싶은 책과 우리가 누군가에게 소개할만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책을 내보자”는 생각에 출판사를 차리게 됐다. <베르그송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물리학자 대 철학자> 등 30여권의 번역서를 계약해 출간작업을 진행하면서 서점 설립과 ‘아카데미 소요’ 프로그램 운영까지 자연스레 흐름이 이어졌다.

아카데미 소요는 소요서가 위 세운상가 5층에 마련된 ‘연구소 오늘’ 공간에서 열리는 강의 프로그램이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 외부강사가 내년 여름까지 서양 철학사를 강의한다. 내년부터는 페미니즘 및 청소년과 초심자를 위한 철학입문강의 등으로 주제를 넓히고, 별도 강연 공간도 확보할 계획이다. 운영진은 “서점 운영의 주체인 법인 ‘연구소 오늘’ 아래 출판-서점-아카데미가 소요서가의 세계관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운영진에 따르면 “출판은 철학적 개념을 만드는 일, 서점은 만들어진 개념을 책이라는 물질로 만들어 전시하는 것, 아카데미는 그 내용들을 사람들과 공유하며 다시 새 개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다.

소요서가를 말할 때는 ‘을지로’라는 공간의 의미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세운청계상가와 을지로는 단순히 예쁘고, 힙한 공간은 아니다. 운영진은 “을지로는 특수성이 있는 공간이다”라며 “도시 한복판에 마치 변두리가 있는 것 같은 독특한 이중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독특한 공간을 반복적으로 배회하는 경험은 새로운 사유의 계기가 된다.

“서점에 오시는 분들이 가운데 테이블을 도는데, 그게 한 번으로 안 끝나죠. 마음에 들었던 책에 한 번 더 가서 보면서 여러 번 돌게 되죠. 신화적인 의미에서의 반복은 뭔가를 학습하고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이고, 놀이로서의 반복은 끝없이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서점에 와서 반복적 행위를 경험하고, 서점을 나가서는 을지로라는 공간을 한 바퀴 더 돌면서 서울이라는 도심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해요. 나에게 익숙한 공간을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새롭게 보는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에 있는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소요서가로 가는 길에 오래된 철물점, 조명가게들을 만나게 된다. 우철훈 선임기자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에 있는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소요서가로 가는 길에 오래된 철물점, 조명가게들을 만나게 된다. 우철훈 선임기자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에 있는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큰 창을 통해 서점 내부가 시원하게 보인다. 우철훈 선임기자

을지로 세운청계상가 3층에 있는 철학전문서점 ‘소요서가’. 큰 창을 통해 서점 내부가 시원하게 보인다. 우철훈 선임기자

주식 투자 입문서가 한해 종합 베스트셀러 1, 2위를 다투는 ‘실용서의 시대’에 철학책을 읽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운영진은 이러한 ‘우문’에 철학책 개념을 담아 ‘현답’을 내놓았다. 서가에는 칸트의 책 <계몽이란 무엇인가>가 꽂혀있다. 이 책에서 계몽은 미성년에서 성년 상태로의 이행이다. 칸트가 말하는 미성년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위에 기대 사유하는 사람’이다. 칸트는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말한다.

“실용서가 삶에 도움이 되는 매뉴얼이라고 보면, 철학책은 매뉴얼은 아니지만 삶의 궁극적인 큰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칸트의 말처럼 스스로 철학함을 배울 수 있다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소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죠. 실용서와 철학서는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에요. 저한테는 철학책이 실용서입니다.”

소요서가를 찾아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운영진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삶의 질문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참 생각한다고 한다. “물음을 유도하고, 답하는 행위 자체가 철학”이라는데, 서점을 찾아 책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철학하기를 시작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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