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에 있던 ‘조선왕조 실록·의궤’···110년 만에 귀향하다

2023.11.09 15:58 입력 2023.11.09 23:50 수정

12일 개관 오대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상설 전시

1913년 일제 강탈, 반환과 환수거쳐 안착…“기록문화의 정수”

‘조선왕조 실록·의궤 오대산사고본’이 일제의 강탈 이후 110년 만에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조선왕조 실록 오대산사고본 중 ‘성종실록’(1606년, 국보, 왼쪽)과 조선왕조 의궤 오대산사고본 중 ‘영조묘호도감의궤’의 반차도 세부 모습(1890년, 보물).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조선왕조 실록·의궤 오대산사고본’이 일제의 강탈 이후 110년 만에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조선왕조 실록 오대산사고본 중 ‘성종실록’(1606년, 국보, 왼쪽)과 조선왕조 의궤 오대산사고본 중 ‘영조묘호도감의궤’의 반차도 세부 모습(1890년, 보물).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일제의 약탈 이후 110년 만에 원래 있던 강원 평창의 오대산 품에 안겼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역시 일제에 약탈됐던 ‘조선왕조의궤 오대산사고본’(보물) 등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 인근의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평창군 진부면)에 소장돼 전시를 통해 공개된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고궁박물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궤 오대산사고본’을 새롭게 단장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소장·전시한다”며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11일 오후 2시 개관식을 거쳐 12일부터 일반 관람객을 맞이한다”고 9일 밝혔다.

긴 여정 끝내고 마침내 돌아온 오대산사고본 실록·의궤

사진 왼쪽부터 조선왕조 실록 오대산사고본 가운데 ‘중종실록’(1606년)과 ‘선조실록’(1616년), ‘효종실록’(1661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사진 왼쪽부터 조선왕조 실록 오대산사고본 가운데 ‘중종실록’(1606년)과 ‘선조실록’(1616년), ‘효종실록’(1661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조선왕조의 실록·의궤·도서 등 중요 기록물을 보관하던 전국 5곳의 사고(史庫) 중 ‘오대산사고’에 보관됐던 실록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현재 전해지는 완질 분량이 1187책에 이를 정도의 방대한 기록물로 인류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이며,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다만 실록 중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순종실록은 국보 등에서 제외됐다.

조선시대에 까다롭게 완성된 실록은 전국의 별도 사고에 보관됐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성주·전주 사고에 보관했으나 임진왜란 동안 전주사고본만 남고 다른 사고의 실록은 불타 없어졌다. 이후 선조 때인 1603~1606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재간행해 정본은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의 정족산사고, 봉화의 태백산사고, 묘향산사고(훗날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에 보관했다. 오대산사고에는 당시 교정쇄본이 보관됐다.

그러나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1913년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동경제국대로 반출된 실록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 1932년 27책이 경성제국대(현 서울대)로 돌아왔다. 이후 2006년 47책이 반환됐고, 2017년 일본에서 1책이 추가로 매입돼 환수됐다. 이로써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모두 75책이며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왔다.

12일 부분 개관하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문화재청 제공

12일 부분 개관하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성종실록’ ‘중종실록’ ‘선조실록’ ‘효종실록’으로 구성됐다. 이 중 ‘성종실록’ ‘중종실록’은 최종 교정쇄본을 정본 대신 봉안한 유이한 사례로, 정본과 달리 실록 편찬의 중간 과정과 교정부호 체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오대산사고본 외의 실록들은 현재 ‘정족산사고본’(1187책)이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돼 있는 것을 비롯해 부산의 국가기록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조선시대 각 사고에는 실록과 함께 의궤(儀軌)도 함께 보관됐다. 오대산사고에도 조선왕조의궤가 있었지만 1922년 일제가 일본 궁내성으로 가져갔다. 이후 2011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반환됐다.

조선왕조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주요 행사의 준비와 시행·사후 처리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국가기록물이다. 조선 전기의 의궤는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졌고, 지금 전해지는 의궤는 1601~1942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현재 국내외에 4000여책이 남아 있는데, 이 중 오대산사고본 의궤 43종 82책을 포함해 모두 1757건 2751책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실록·의궤의 편찬~환수 역사 상설전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문화재청 제공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문화재청 제공

12일 개관하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 원본을 상설 전시한다. 박물관은 원래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운영하던 실록·의궤전시관을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그동안 전시관과 지역 사회는 원본 실록·의궤의 제자리 찾기 운동을 벌였고, 박물관이 새롭게 꾸며지면서 원본 유물들이 오대산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박물관은 총 면적 3537㎡로 지상 2층 규모다. 실록 등 유물 1200여점을 소장하며 수장고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실감형 영상관 등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12일에는 우선 부분 개관으로 상설전시실이 문을 연다. 상설전은 총 3부로 구성돼 실록과 의궤의 편찬부터 일제강점기 당시 반출과 환수 과정, 오대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살펴본다. 1부에서는 조선왕실의 기록물 생산과 보관, 사고의 역사, 오대산사고의 운영 내용을 소개한다. 2부에서는 오대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조선왕조 의궤 오대산사고본 가운데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보인소의궤’의 조선왕보 도설 부분(1878년)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중화전 도설 부분(1904년),  ‘영조묘호도감의궤’(1890년) 표지, ‘(철종)국장도감의궤’(1865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조선왕조 의궤 오대산사고본 가운데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보인소의궤’의 조선왕보 도설 부분(1878년)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중화전 도설 부분(1904년), ‘영조묘호도감의궤’(1890년) 표지, ‘(철종)국장도감의궤’(1865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3부는 오대산사고본 의궤들을 소개한다. 영조의 묘호(왕의 타계 후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호) 관련 기록물인 ‘(영조)묘호도감의궤’(1890년·보물), 임금의 인장인 보(寶)와 왕세자·정부기관 등의 인장이라 할 인(印)의 제작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인 보인소 관련 내용을 기록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1878년·보물), 경운궁(현 덕수궁) 중건 과정을 담은 ‘경운궁중건도감의궤’(1904년·보물). 철종의 국장 관련 기록물인 ‘철종국장도감의궤’(1865년·보물) 등이 선을 보인다. 또 의궤에 찍었던 인장인 ‘유서지보(諭書之寶)’와 활자본 의궤의 도설(내용 설명을 위해 수록된 그림)을 찍어낸 ‘연화대무의궤도설판’, 각종 유물 등도 전시된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https://sillok.gogung.go.kr)은 개관을 기념해 10일에는 실록과 의궤를 오대산으로 옮기는 이운행렬 재연 행사와 축하 공연을, 11일에는 개관식 기념행사를 연다. 개관일인 12일에는 관람객 100명에게 선착순으로 소정의 기념품도 증정한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의 개관을 통해 기록유산 및 환수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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