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엄태구(41)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극 I형 인간’이다. MBTI에서 내향성을 뜻하는 I가 강한 유형이라는 뜻이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엄태구는 작은 칭찬에도 손사래를 치고 몸을 배배 꼬았다. 최근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이하 놀여)의 주인공 서지환과 닮은 듯 다른 모습이었다.
엄태구는 <놀여>에서 키즈 크리에이터 은하(한선화)와 사랑에 빠지는 전직 보스 서지환을 연기했다.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서지환은 부하 직원들에겐 카리스마 넘치지만 처음 찾아온 사랑 앞에선 속수무책인 순수남이다.
첫 로맨틱 코미디 도전인 만큼 촬영을 마친 순간까지도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잘못하면 앞으로 작품이 안 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만큼 그에겐 큰 변신이자 도전이었다.
엄태구는 대중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이래 누아르 장르에서 주로 활약해왔다. 가죽장갑으로 부하 직원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영화 <밀정> 속 일본 순사 하시모토, <택시운전사>의 검문소 군인 박 중사,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쫓기는 신세가 된 조직원 박태구(<낙원의 밤>)까지 어느 하나 강렬하지 않은 캐릭터가 없다. 선 굵은 이목구비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를 누아르에 최적화된 배우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놀여>에 더 끌렸다. “몇 년 전부터 로코가 하고 싶었습니다. 어두운 작품을 연달아 하다 보니 몸이 자연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아요.”
<놀여>의 서지환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엄태구의 얼굴을 발견하게 했다. 코미디부터 액션, 달콤한 로맨스까지 색다른 엄태구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시청률은 2~3%대로 높지 않았지만 방영 기간 내내 높은 화제성을 유지했다. 특히 엄태구는 화제성 조사 드라마·비드라마 통산 출연자 화제성 부문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놀여>에서의 연기가 주목받은 또 다른 이유는 엄태구의 실제 성격 때문이다. 2020년 tvN 캠핑 예능 <바퀴 달린 집> 게스트 출연은 화제가 됐다. 낯선 이들 앞에서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작품에서의 강렬한 이미지와 정반대였다. “8개월 정도 거의 아무도 안 만나고 있던 때 (고정 출연자인) 김희원 선배님이 ‘밥만 먹고 가면 된다’ 해서 집에 있다 나간 거거든요. (내성적인 면모가) 스스로는 답답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좋게 봐주셔서 신기했어요.”
엄태구는 그 흔한 SNS도 안 한다. 국민 메신저인 카카오톡도 쓰지 않는다. 재활 때문에 시작한 헬스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취미도 없단다. 촬영이 없는 날엔 부모님 댁에 내려가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강아지 ‘엄지’와 산책한다. “특별히 뭘 하진 않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쉼을 느끼는 것 같아요.”
연기자는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이다. 현장에서는 상대 배우 외에도 다양한 직군의 동료들과 소통해야 한다. 내향인에게는 쉽지 않은 환경이다. 그래서 한때는 끼를 타고난 사람을 부러워했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다른 사람에겐 없는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고, 나에게도 나만의 무기가 있다”고 여긴다. 다만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지는 비밀에 부쳤다. “차마 제 입으로는…. 장점이 장점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웃음)
말은 그렇게 해도 <놀여>의 성공은 엄태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듯했다. 그는 이제 “정통 멜로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내성적이어도 도전엔 두려움이 없는 걸까. 엄태구는 고개를 저었다. “엄청 두려워해요. 두려워하는데, 결국 선택해야 하니까요. ‘어...’ 하다가 ‘어!’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