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조율사’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을 만났을 때

2024.09.10 17:16 입력 2024.09.11 10:33 수정

영국 스타인웨이 콘서트홀 울리히 게르하르츠

삼성문화재단 후원 조율사 양성사업 위해 내한

브렌델·임윤찬 작업… 온도·습도·고요 중시

38년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

피아노 조율사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서울 세종문화화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피아노 조율사 양성사업 강의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8.30. 정지윤 선임기자

피아노 조율사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서울 세종문화화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피아노 조율사 양성사업 강의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8.30. 정지윤 선임기자

피아노 조율사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30일 세종문화화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조율 시범을 보이고 있다. 2024.8.30. 정지윤 선임기자

피아노 조율사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30일 세종문화화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조율 시범을 보이고 있다. 2024.8.30. 정지윤 선임기자

1990년 독일 함부르크의 장인이 만들어낸 스타인웨이 모델 D가 해체됐다. 생선 배를 가르듯 건반과 페달이 통째로 들려 나왔다. 오랜 시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을 지켜온 아름다운 피아노였다.

지난달 30일부터 3일간 이 피아노는 완전한 해체, 청소, 수리, 조율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영국 런던 스타인웨이 지사장이자 스타인웨이 콘서트홀 수석 조율사인 울리히 게르하르츠(58·사진)가 자기 몸처럼 익숙한 피아노를 샅샅이 훑었다. 삼성문화재단이 후원하는 피아노 조율사 양성사업에 참여한 한국 조율사 20명이 3일 내내 이 광경을 지켜봤다. 청소에 필요한 약품, 페달 디자인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까지 질문이 이어졌다.

게르하르츠의 기술 못지않게, 그가 착용한 ‘Steinway & Sons’가 박힌 검은 작업용 앞치마를 많은 조율사가 열망한다고 현장에서 만난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관계자가 웃으며 말했다.

게르하르츠는 “세계 최고의 조율사”(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라 불린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모든 연주여행에 게르하르츠와 동행하길 원했다. 언드라시 시프, 우치다 미쓰코, 예브게니 키신도 그가 조율한 피아노를 쳤다. 한국 피아니스트로는 조재혁, 김선욱과 일한 적이 있다. 최근엔 런던에서 임윤찬을 위해 스타인웨이 6대를 준비했다. 임윤찬은 그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첫 데카 스튜디오 음반 <쇼팽: 에튀드>를 녹음했다. 한국 체류 중에도 BBC 프롬스에서 연주할 한 피아니스트가 급히 조율을 부탁한다고 연락해 왔으나, 게르하르츠가 한국과 영국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아니스트마다 원하는 음색이 다릅니다. 브렌델은 저음부부터 고음부까지 오케스트라 같은 음색을 내길 원했습니다. 지휘자가 어느 하나의 악기가 튀길 원하지 않듯이, 모든 건반의 음색이 조화로워야 한다는 거죠. ‘피아노가 노래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도 했습니다.”

공연장 특성도 중요하다. 게르하르츠는 피아노가 놓인 공연장의 온도, 습도를 우선 살핀다. 소리에 극도로 민감한 작업이기에 일할 때 절대적으로 조용하길 원한다. 작업 이후 연주자가 건반을 눌렀을 때도 조율 직후와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율할 수 있는 시간도 점검한다. 3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만큼의 작업만 해야 한다.

조율사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30일 세종문화화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열린 피아노 조율사 양성사업 강의에서 조율 시범을 보이고 있다. 2024.8.30. 정지윤 선임기자

조율사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30일 세종문화화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열린 피아노 조율사 양성사업 강의에서 조율 시범을 보이고 있다. 2024.8.30. 정지윤 선임기자

울리리 게르하르츠와 한국의 조율사들이 서울시향 연습실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다. 한국피아조율사협회 제공

울리리 게르하르츠와 한국의 조율사들이 서울시향 연습실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다. 한국피아조율사협회 제공

게르하르츠는 1986년 함부르크의 스타인웨이 공장에서 조율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타인웨이 조율사는 1년에 단 3명 뽑으며, 3년 반의 수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 조율 방식은 38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손으로 청소하고 귀로 들으며 조율한다. 조율사들 사이에서도 디지털 튜닝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의견이 나오지만, 게르하르츠는 여전히 자신의 귀를 믿는다. 게르하르츠는 “청력을 유지하기 위해 록, 팝, 디스코 같은 시끄러운 음악은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클래식 연주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듯, 조율사도 마찬가지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유럽 공연장들은 악기의 유지·보수 비용을 줄이고 있으며, 조율사가 되려는 사람도 줄고 있다. 게르하르츠는 “피아노 연주자는 많은데, 피아노 조율사가 적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경우 가정용 업라이트 피아노 판매가 줄어들었음에도 전국 콘서트홀이나 연주자의 연습용 그랜드 피아노 판매가 늘어 조율사 수는 1300~1500명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서인수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수석부회장은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상위 10% 조율사들에겐 쉴 새 없이 일이 몰린다”고 했다.

일이 어렵다고 대충 할 수는 없다. 게르하르츠는 최고의 조율사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덕목으로 고전적인 답변을 내놨다. “‘열정’입니다. 5시부터 퇴근할 생각을 하는 사람,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콘서트홀 조율사가 될 수 없습니다. 미래에도 디지털 피아노는 그랜드 피아노를 대체할 수 없으며, 최고의 조율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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