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떡볶이를 잘 먹거나, 한국어로 트로트를 부르거나. 지난 1~2개월 사이 공익광고협의회에서 만들고 TV에서 방영 중인 ‘다문화Ⅰ: 이주배경청소년’ ‘다문화Ⅱ: 이주배경 이웃들’에 등장하는 이주배경 시민들의 모습이다. 모두 ‘우리는 모두 우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이들 광고에선 이주배경을 지닌 출연자들이 피부색을 제외하면 ‘우리’ 한국인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두들 한국어 소통에 능숙하며, 학교 친구나 회사 동료들 사이에 문화적 이질감 없이 섞여 지낸다. 이주배경 친구에 대해 다른 게 있느냐는 질문에 다른 친구는 답한다. “우정이 남다르죠.”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우리’라는 내집단 안에 속한다. 이것이 이번 다문화 공익 광고의 메시지다. 이것은 어딘가 모순되어 보인다. 광고 제목에선 ‘다문화’를 강조하지만 정작 소개되는 인물들은 한국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어, 서로의 다름을 조율하거나 관용해야 할 계기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다문화 사회가 직면한 가장 핵심적인 갈등이자 숙제임에도. 광고에선 매운 걸 누구보다 잘 먹는 이주배경 청소년이 친구와 즐겁게 떡볶이를 먹지만, 현실에선 무슬림 대체 급식이 없어 점심을 굶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위한 대체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일반’ 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역시 또 다른 ‘일반’인들의 말 같지 않은 말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서.
해당 공익광고가 다문화 가정 및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은폐하거나 한국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의도의 프로파간다라는 뜻은 아니다. 다른 피부색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주민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인간이라는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으로 유효할 수 있다. 가령 TV 광고 버전보다 긴 인터넷 바이럴 버전의 ‘다문화Ⅱ: 이주배경 이웃들’에서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취업까지 한 로레인의 모습을 비추며 내레이터인 강남은 “동료들과 함께 하는 커피 타임이 삶의 낙인 건 우리 모두 똑같죠?”라 말하고, 그 옆의 인형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요”라고 부연한다. 누구든 일하는 삶이란 고달프고, 쉬는 시간은 즐겁다. 나와 다른 인종, 문화권, 혹은 성적 지향을 지닌 이들에게도 이러한 느슨한 보편성이 있다는 감각은 상대를 나와 같은 공통의 인간이자 시민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문화 혹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정을 중요시하는 소위 신좌파와의 논쟁에서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이하는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에서 인용) 특정 범주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적 차이보단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에 집중하는 게 더 쉽고 유용하다고 말한다. “그들도 자식이나 부모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똑같이 자기 의심에 사로잡히며, 모멸당하면 자신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이해시키는 것”이, “그들이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할 때 다른 모든 사람과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타자이자 낙인찍힌 자로서의 ‘그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더 실용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공익 캠페인은 미심쩍다. 이 광고는 혐오와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계기로서의 공통성을 탐구하고 재현해내기보단, 애초에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공통성을 노력 없이 선취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과 ‘우리’를 연결할 가교를 놓는 대신 이미 ‘우리’에 속할 법한 이들을 편의적으로 재현한다. 앞서 예시한 로레인의 경우 일할 때 제일 즐거운 순간에 대해 “퇴근할 때?”라 답한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그에게 인종을 넘어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다만 이조차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회사원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이주노동자에게까지만 허용된다. 한국 농촌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인권 문제를 다룬 우춘희의 <깻잎 투쟁기>에는 근로계약서에 ‘07시부터 18시까지 근로 시간 중 점심시간 포함 3시간의 휴게 시간’이 적혀있지만 실제로는 1시간도 채 쉬지 못하고 하루 10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들의 사연이 소개된다. 초과 노동을 한 금액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땡볕에서 하루 2시간씩 공짜 노동 중인 이들과도 커피타임과 퇴근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로티가 말한 서로의 공통성에 대한 강조란 이처럼 착취당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 현존하는 갈등과 불편함을 삭제한 무균질의 비정치적 세계를 그리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정치적 세계 재현은 기만이다.
선의를 가정하더라도, 이런 기만적 재현은 결과적으로 차별을 정당화한다. 현실의 구체적 차별과 불의를 담아내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이웃의 모습을 재현하고 그들만을 ‘우리’로 호명할 때, 불편한 이웃은 ‘우리’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 본인들의 문화를 고수하는 이들, 한국어에 서툰 이들, 이주노동자로서 겪는 착취에 항의하는 이들은 한국을 존중하지 않고, 게을러서 한국어를 배우지도 않으며, 고국보다 많이 벌면서 불만만 많은 공동체의 적으로 형상화된다. 착취와 임금 체불 때문에 이탈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나 공교육에 편입하지 못하는 미등록 아동은 말할 것도 없다. 하여 그들에겐 ‘우리’에 속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차별이 정당화된다. 당장 다수 한국인들의 심기를 조금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쓴 이번 공익 광고에서조차 유튜브 댓글에선 세금으로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는 건 자국민에 대한 역차별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차별은 나쁘지만 어떤 차별은 정당하다는 정교하게 왜곡된 세계관 앞에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공통성의 강조는 무력하다. 무슬림 대체 급식이 없어 굶는 아이들의 배고픔에 호소한들 개종하지 않은 이들의 잘못으로 취급될 뿐이다. 앞서 인용한 로티와의 철학적 논쟁에서 낸시 프레이저는(역시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에서 인용) 공통적인 인간성의 호소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상대적으로 누군가를 존중 혹은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구성하는 제도화된 문화 가치 패턴”이 부정의를 존속시키는 장애물이라 말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우리’라는 희망찬 외침은 ‘우리’에 속할 좁은 문의 기준을 정하는 이들이 바로 차별의 주체라는 것을 간과하기에 처절할 만큼 공허해진다.
공익광고협의회의 이번 다문화 광고는 그래서 어떤 의미로든 실패한 광고다. 차이에 대한 존중을 이끌어내지도, 타 문화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지도 못했으며, 하다못해 스스로 의도한 동질감의 공유라는 목표에서조차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광고가 없느니만 못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불편한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갈등을 회피하는 방식으로는 유의미한 메시지를 아주 조금도 생성할 수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의 의도마저 배신한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경로로의 접근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감각에 호소하든,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정을 요청하든, 그 모든 것은 현존하는 차별을 시정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만 실천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물론 그 메시지는 누군가를 화나게 할 것이고,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상관없다. 바로 그 분노와 갈등이 ‘우리’라는 내집단 바깥의 폭력에 방치된 이들이 매순간 쉼 없이 경험하는 것이라는 깨달음만이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려 ‘우리는 모두 우리’라는 감각을 일깨울 것이기에.
<위근우 칼럼니스트>